MORE NEWS
-
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4
© 세종타임즈
대안으로 지원한 경성사범도 낙방
1926년 3월6일부터 3일간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치러진 필기시험에서 최승희는 탁월한 성적을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3월19일의 면접시험에서 최승희가 불합격 판정을 받았는데 이유는 또다시 ‘연령 미달’이었다고 했다.
“... 당장 준비를 해서 사범학교 시험을 봤습니다. 시험은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남몰래 자신도 있었고 예상대로 합격했습니다. ... 이 기쁨도 헛된 기쁨이었습니다. 결국 불합격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음악학교에 가려고 했을 때와 같이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가슴 아픈 이유로 구두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최승희, 1936, , 34-35)
최승희의 필기시험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는 그의 조선어판 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나는 1백명 모집에 8백60명의 응모자 중에서 일곱 번째로 합격이 되었다. 그때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생 중에 우등생이 아홉 명인데 내가 여덟 번째로 우등 졸업한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이 사범학교의 시험성적이 나은 편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울어?’ 오빠가 다그쳐 물었다. ‘나이가 적으니 일 년만 놀다가 내년에 오래.’”
최승희의 기억에는 약간의 과장이 있었던 것 같다. 그해 경성사범학교 여자연습과의 정원은 80명이었고, 응시자는 3백94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경성사범학교 지원상황은 1926년 2월18일의 에 자세히 보도되어 있었다.
“경성사범학교에서는 올해 보통과 1백명, 남자연습과 갑조 80명, 을조 50명, 여자연습과 80명의 예정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는데, 16일까지 지원자 수는 보통과 1천5백명, 남자연습과 갑을조를 합하여 1천2백명, 여자연습과 3백94명에 달하여, 작년도의 보통과 1천8백명, 남자연습과 8백50명, 여자연습과 2백70명으로부터 보통과에서는 감소하였으나 남녀 연습과에서는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전반적 지원 상황에는 기억에 착오가 있었더라도 자기 성적에 대한 기억은 정확했을 것이다. 필기시험 성적이 3백94명 중에서 7등이었다면 대단히 우수한 성적이다. 관비학생(60명)이든 사비학생(20명)이든 넉넉히 합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불합격처리 되었다.
‘연령 미달’이라는 낙방 이유는 합당했을까? 여기에도 의문의 여지는 있다. 경성사범학교의 교칙에는 보통과의 연령 규칙은 있지만(12세, 제64조) 연습과에는 명시적인 연령 제한(65조)이 없었다. 다만 연습과 지원자는 5년제 소학교(일본인)나 4년제 보통학교(조선인) 졸업자여야 했으므로 소학교와 보통학교에 연령제한(12세)을 둔 조선교육령 16조와 10조를 적용하면 조선인은 16세, 일본인은 17세가 되어야 사범학교에 지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만14세였다. 도쿄 음악대학 지원할 때와 똑같은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지원자 평균보다 두 살이나 어린 최승희를 입학시키는 것이 학교에게는 부담일 수 있었을 것이다. 1년의 연습과를 마치고 교원으로 부임해도 만15세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화성(朴花城, 1903-1998)은 1918년 3월에 숙명여고보를 졸업(9회)한 직후, 15세의 나이로 천안과 아산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원 근무를 시작했었다.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아기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다.
경성사범학교가 필기시험 7등의 지원자를 낙방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교칙에 명시된 것도 아니고 선례까지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최승희는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이는 최승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경성사범학교에 합격해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했더라면 조선무용을 세계에 알린 ‘조선의 무희’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해 3월19일 최승희가 구술시험에 낙방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큰오빠 최승일은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 그만 두어라, 승희야, 그리고 내 이야기나 좀 들어 보아라.” 진학에 거듭 실패한 최승희의 앞날은 이제 오빠의 그 “이야기”에 온통 매달리게 되었다.
2020-08-02
-
혼돈의 시대를 말한다
© 세종타임즈
올해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가 코로나19 사태로 초비상이다. 중국으로부터 시작된 코로나19는 초기에는 우한폐렴이란 용어로 등장했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암울한 바이러스 세상이 현실화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온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2020년 8월 2일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214개 국가에서 무려 17,99만0,233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68만7,564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미국이 4,76만2,945명의 확진자에 사망자만도 15만7,825명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다. 그 다음이 브라질과 인도, 러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페루 순이다. 우리나라도 1만4,336명의 확진자에 301명이 사망했다. 전 세계적으로 74위이다. 청정지역이라고 허세를 부리며 빗장을 걸어 잠그던 베트남도 갑작스럽게 발생해 586명의 확진자에 3명이 사망했다. 정작 코로나19 발원지였던 중국은 8만4,337명에 4,636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지만 이 수치의 신뢰성에 전 세계가 의문을 던지고 있기는 하다.
중국은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무한 책임이 주어져 있는데도 그 책임을 애써 감추려고 하는 것 같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WHO(세계보건기구)의 신뢰도 무너진 지 오래이다. 중국을 비호하고 초기 대응을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세계인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가장 심각한 피해국가인 미국은 아예 탈퇴를 선언할 정도이다. 국제적으로 천문학적인 피해보상 문제도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의 발원지인 중국은 전 세계를 아비규환으로 만들어 놓고도 아직도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2019년 12월 1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 우한화난수산물도매시장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전 세계적인 대유행인 팬데믹 상태로 몰아넣는 데는 불과 몇 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대한민국도 확진자가 발생한 것은 지난 1월 20일이었다. 우한시에 거주하는 35세 중국인 여성으로 국내입국자였다.
2월 19일부터 대구·경북지역에 신천지 대구교회를 중심으로 다수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집단감염이 시작되었다. 신천지교인들이 슈퍼전파자로 지목되면서 비상사태가 이어지고 혼돈의 시기를 맞는다. 대구·경북은 그야말로 유령도시를 방불케 하는 상황에까지 처했다. 이후에도 구로구 콜센터, 이태원클럽, 대전방문판매업체 등의 집단감염사례가 이어진다. 학교개학마저 연기되고 공적마스크를 약국을 통해 공급했다. 이제는 마스크가 상용화되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마스크 세상이다. 이런 혼돈의 시기가 지난 7개월의 시간표 속에 담겨져 있다.
경제도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았다. 자영업자들이 무너지고 실업자가 급증했다. 긴급재난지원금이 지급되었지만 한 때 반짝 경기만을 유도한 채 상황을 도로 악화되고 있다.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올 2분기 국내총생산 성장률이 전 분기 대비 마이너스 3.3%를 나타냈다. 이는 외환위기 발생이후 1998년 1분기 마이너스 6.8% 이후 22년 만에 가장 낮은 최악의 수준으로 조사됐다. 물론 코로나19로 세계 각국이 국경을 걸어 잠그면서 자동차, 스마트폰 등 수출이 크게 줄어든 게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코로나 충격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데 더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문제는 자영업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제조업이나 수출기업들의 어려움은 더할 나위가 없다. 어렵지 않은 곳이 없다. 모든 지표가 부정적인 것을 보면 지금이 최악의 상황임을 단적으로 읽을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대한민국이 어려움을 겼었던 상황에서 빗장을 걸어 잠그던 베트남도 이제는 거꾸로 확진자가 발생하고 경제난을 겪으면서 다급해지자 이제는 대한민국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비행기까지 되돌려 보냈던 배신감으로 인해 베트남을 보는 시각이 180도로 달라졌다. 우호국가인 줄 알았던 베트남이 코로나19 사태로 태도가 돌변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해 430만 명이라는 엄청난 관광객이 찾았지만 이제는 싸늘해졌다. 그 유명한 관광지 다낭도 확진자 발생으로 초토화되고 있다고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지 못했던 베트남이 대한민국을 외면하면서 이제 자업자득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기업들의 투자마인드도 꺾여 인근 미얀마나 인도네시아 등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래저래 베트남은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는 바람에 철퇴를 맞고 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실업자 3,000만 명 시대를 맞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 사태는 이웃나라와의 관계마저 재설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까지 제공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환심을 다시 사기에는 좀처럼 쉽지 않을 듯싶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배신의 아픔이 크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국가가 재조명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대립상황이 과거 냉전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점입가경이다. 휴스턴의 중국 총영사관을 폐쇄할 정도이다. 물론 중국도 청두 미국 총영사관을 폐쇄하며 맞불을 놓았지만 대립양상이 심상치 않다. 천멸중공(天滅中共)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하늘이 중국공산당을 없앤다는 말로서 이를 외쳐대는 미국과 동조하는 서방국가들의 움직임이 거세다. 중국은 주변 16개국과 분쟁이 진행 중이다.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립도 결코 간단치 않다.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 제품 불매운동도 거세다. 영국 등 서방세계가 모두 하나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호응하고 나서고 있다. 세계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는 모습이다. 그동안 중국과의 포용을 상징하던 닉슨독트린의 폐기도 선언했다. 미국의 강경자세는 자유진영이냐 공산진영이냐의 선택지에 천멸중공이라는 목표를 설정해 놓고 있다. 미국과 같은 위상을 노리며 패권경쟁을 벌여온 중국이 혹독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듯 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다 두 달 동안 쏟아 붓던 폭우로 인해 28개성에서 최악의 대홍수피해가 발생해 수재민이 무려 5,5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크고 작은 댐제방들이 무너지고 세계 최대의 댐인 싼샤댐 마저 붕괴위험에 처해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사상 최악의 물난리로 아비규환이다. 마치 지옥 같은 모습이다. 코로나19로 유령도시를 방불케 하던 우한시도 도시가 침수되어 또 다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중국의 폭우 상황과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처참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뭄으로 고통 받는 곳도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재앙이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가 도래한 듯하다.
이처럼 전 세계가 혼돈과 고통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남의 일처럼 알았던 폭우도 대전지역과 부산지역, 서울에까지 쏟아져 아파트가 침수되고 강남역 일대가 난리가 났다. 중국의 폭우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이라는 경험을 했다. 여기에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피로감도 날로 더해가고 있다. 아직도 코로나19는 끝나지 않았다. 사회경제적 피해도 지속되고 있다. 과거 IMF경제체제와 금융위기 등을 경험한 나라이지만 코로나19 사태를 과연 어떻게 지혜롭게 극복하느냐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져 있다. 천멸중공을 표방하는 자유세계진영논리에 과연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알게 된 베트남의 배신과 이중적인 자세는 국민들이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보여준 우리 대한민국의 호의와 신의가 얼마나 허망한지도 깨닫게 되었다. 혼돈의 시대를 맞아 개인은 물론 대한민국과 국민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교훈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고통의 시기에 국민들을 위하여 아픔을 함께 하며 고통의 눈물을 닦아 줄 위정자와 지도자들의 모습도 그려본다. 답답한 국민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인물, 난세에 나타난다는 영웅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2020-08-02
-
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3
© 세종타임즈
대안으로 지원한 경성사범도 낙방
원서도 접수해 보지 못한 채 음악학교 진학은 무산되었지만 최승희는 실망하지 않았다. 곧바로 경성사범학교 진학 계획을 세웠는데 아마도 경성사범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작은오빠 최승오의 조언을 받았을 것이다. 굳이 가족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당시 경성사범학교는 ‘취업이 보장된 떠오르는 명문’으로 세간의 평판이 높았고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했던 학교였다.
1922년에 개교한 경성사범학교는 들불처럼 번진 조선의 교육열을 배경으로 탄생한 학교였다.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의 저조한 취학률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새로 창간된 와 , 등의 민족지들은 교육개선을 시급한 과제로 부각시켰다. 총독부의 교육억제와 차별정책이 전방위적으로 비판됐고 학교 증설과 교사 충원의 요구가 빗발쳤다.
여론에 밀린 조선총독부도 교육 개선에 나섰지만 열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학교 증설 문제는 그로부터 10년이나 지난 1929년에야 ‘한 면에 적어도 하나의 보통학교를 설립한다’는 1면1교 정책을 수립했고 그나마 그것이 달성된 것은 1936년이 되어서였다. 교원 양성 문제에는 총독부가 즉각 움직였고 경성사범학교를 설립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였다.
일제 강점 직전까지 조선 정부는 한성사범학교(1895)를 운영했고, 서울의 국민사범학교(1905)과 서우사범학교(1907), 대구의 대구사범학교(1906) 등이 설립되었다. 뒤이어 평양과 원산과 개천, 진주와 광주와 평택 등에도 민간 사범학교들이 설립되어 교사를 양성하고 있었다.
일제는 강점이후 한성사범학교를 포함해 모든 사립사범학교를 폐지하고, 사범학교 기능을 관립고등보통학교에 복속시켰다. 즉 관립고보에 사범과 1년 과정을 따로 두어서 교원이 되려는 학생들이 이를 이수하게 했다. 이로써 교원의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고, 일제의 교육정책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사람만 교원으로 임용될 수 있었다.
삼일운동 직후부터 시작된 학교 증설과 교원 충원 요구에 압력을 받은 총독부는 1921년 5월부터 경성사범학교를 시범 운영했고, 1922년 2월 사범학교 규정을 제정한 뒤 4월에는 남학생 1백명을 선발해 경성사범학교를 정식으로 개교했다. 이 학교는 중등학교였으므로 소학교를 졸업한 일본인이나 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이 모두 지원할 수 있었고, 5년의 수업연한을 이수한 뒤에 조선 각지의 보통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경성사범학교는 관립학교였으므로 학비가 없었고, 특히 ‘관비’학생으로 선발되면 매월 15원의 생활비까지 지급받았다. 학비가 면제된 대신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의무적으로 교원에 복무해야 했다. 의무 복무연한은 관비학생이 5년, 사비학생은 2년이었다.
경성사범학교의 인기는 대폭발했다. 학비가 무료인데다가 취업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개교 2년만인 1924년에는 1백명 모집에 4천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지원자 중에는 보통학교 졸업생보다 고등보통학교 졸업자가 더 많았다. 이에 경성사범학교는 1923년부터 교과과정을 보통과와 연습과로 나누었다. 고등보통학교 졸업자가 지원하는 연습과의 학생들은 1년의 연수기간만 이수하면 바로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이 때문에 연습과 지원자는 더욱 늘었다.
1925년부터는 여자연습과가 신설되어 여고보를 졸업한 여학생도 지원하기 시작했다. 최승희가 지원한 것이 바로 경성사범 여자연습과였다. 1926년 2월18일의 에 따르면 80명을 선발하는 여자연습과에 3백94명이 지원했다고 보도했다. 이미 5대1의 경쟁률이었다.
당시 는 여자연습과 지원자들을 출신학교별로 분류했는데 고등여학교 출신인 일본학생이 1백28명, 여고보 출신인 조선학생이 1백25명이었다. 조선학생들 중에서는 경성여고보와 평양여고보 졸업생이 42명과 45명으로 대다수를 차지했고, 경성의 숙명(19명)과 진명(11명)과 동덕(3명)과 이화(1명), 개성의 호수돈(3명), 평양의 정의(1명)여학교 등의 순서였다.
최승희는 19명의 숙명여고보 출신 지원자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3월7일 와 에 발표된 숙명여고보 졸업자의 진로 명단에는 경성사범 입학예정자가 18명으로 되어 있었다. 19명중 1명이 낙방한 것이다. 그 유일한 낙방자가 바로 최승희였다.
2020-07-26
-
프로야구 관중 입장재개가 던져주는 의미
© 세종타임즈
정부는 주말인 26일부터 프로 스포츠 관중 입장 재개 관중 입장을 허용하기로 했다. 무관중 프로야구 경기가 시작된 지 2개월만이다. 프로축구는 다음달 1일부터이다. 물론 전면 개방이 아니고 수용 가능 인원의 10% 이내 입장으로 제한적 조치지만 경기장 입장 재개를 기다리던 팬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지난 2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열고 "프로 스포츠 관중 입장 재개 방안을 오늘 회의에서 논의한다"고 밝힌데 이어 나온 것이다. 하지만 경기장 내외 방역수칙이 철저히 준수된다는 전체 하에 최소 인원부터 입장할 것"임을 밝혔다. 곧 이어 문화체육관광부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안에 따라 26일부터 관중 입장을 허용하겠다는 발표했다. 아쉽게도 5개 구장에서 치르는 경기 가운데 현재 거리두기 2단계 조치가 내려져 있는 대전과 광주는 제외됐다.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진행되고 있는 대전은 27일 이후로 미루어 졌다. 그렇지만 사상 처음으로 무관중 경기를 TV로 지켜보던 팬들에게는 청량제가 되고 있다.
사실 코로나19가 지역감염확산이란 우려감 속에 대전과 광주는 고강도의 거리두기를 통해 확산을 차단하는 노력을 펼쳐 왔다. 대전의 경우 다행히 방문판매업체를 중심으로 퍼지던 감염 상황이 다소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고는 있지만 언제 어디서 전파가 또다시 이뤄질지 지역민들의 걱정은 여전한 상황이다. 일부지역에서는 동선도 공개되지 않은 채 현장을 조용히 방역처리 하는 경우마저 생기고 있다. 뒤늦게 감염자가 방문했던 공간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사례도 접하게 된다. 26일부터는 종교단체도 소모임이 허용되는 등 규제가 완화되어 다소나마 불편을 덜게 되었다. 장애인들의 직업시설과 일부 작업장들도 규제가 풀어져 다시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규제의 완화조건들은 방역수칙을 준수하고 나름대로 관리를 철저히 한다는 전제 조건이 달려있다.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든지 원점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만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고강도만 빠질 뿐이지 거리두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사회적 규범처럼 되어가고 있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와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다 하더라도 생활 속에 습관처럼 자리 잡을 전망이다.
생활 속에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은 이제 일상에서 기본이 되고 있다. 공적 마스크 공급체계도 마무리되어 자율화되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마스크 대란을 겪었는데 그 때가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마스크가 곳곳에 넘쳐나고 있다. 여름철 비말마스크도 대중화되었다. 가격도 오히려 내려갔다. 그동안 공적 마스크가 너무 비쌌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마스크는 이제 생활화되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사용에 따른 지혜를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마스크를 형식적으로 착용하고 다니는 사람에서부터 아예 벗어던지고 다니는 사람에 이르기 까지 공중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심지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삼가야 해야 할 대화도 다른 탑승자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목적 승강장에 도착할 때까지 지속하는 사례도 있다. 심지어 기침까지 하면서 탑승자들을 불안케 하는 경우도 왕왕 보게 된다. 이른바 공적 예절이 중요한 시점에서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대중교통 이용이 겁날 정도의 장면들이 자주 목격이 되는 것은 아쉬운 현상이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긴장감만 갖고 살 수는 없다. 일상이 그야말로 숨 막히는 것만 같은 순간순간들이지만 그래도 정신건강을 위해 돌파구는 찾아야 한다. 요즘에는 코로나 감염염려증이 너무 심한 시대에 살고 있다. 결벽증일 정도로 세심한 사람들도 주변에 많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지키지 위한 자구노력으로 코로나19 시대에는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걱정만 하고 살 수도 없다. 그동안 교인들은 교회에 대한 규제가 너무 일방적인 정도라며 불만을 토로해 왔다. 고강도 규제가 집중하는 경향 때문이다. 기도회나 성가대연습도 하지 못하고 식사도 같이 못하고 소모임 자체도 금지되자 마치 손발이 묶인 것처럼 답답함을 호소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지난 24일 오후 6시를 기해 이런 교회 방역수칙 의무화 조치를 해제했다. 이제 그동안의 규제가 풀려 다소나마 일상을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거리두기는 여전해 진행된다. 아직도 진행형인 코로나19 사태에는 방심은 금물이다. 그동안 터득한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 유비무환의 자세이자 감염병을 예방하는 지혜임은 분명하다.
프로야구를 시작으로 무관중 경기가 풀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 일상의 피로감을 덜어가자는 의미인 것 같다. 너무나 삭막하고 피폐해지는 사회적 분위기를 일신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가 지금 프로야구 등 스포츠가 아닐까 싶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보면서 스트레스도 날리고 긴장감도 풀어보는 것은 이 시기에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측면이 넘치는 작금의 상황에서 긍정과 희망의 불씨를 키워나가는 공동체의 노력도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힘들어진 자영업자들에서부터 폐업 위기를 맞고 있는 사업장에 이르기 까지 정신적 고통을 덜기 위한 대책이 수반되어야 한다. 프로야구경기가 무관중이라는 폐쇄적인 상황에서 관중입장재개라는 숨통을 찾았듯이 우리네 일상도 이런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거리두기를 한다고 마음까지 거리를 두는 사회가 되어서도 안 된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는 말이 있다.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 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코로나 19 사태 생활 속 거리두기는 지속하지만 마음만은 멀지 않게 늘 가까이 함께 하며 희망과 긍정의 꽃이 피어나길 바란다. 이런 함축의미를 프로야구 관중 입장재개가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
2020-07-26
-
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2
© 세종타임즈
도쿄의 음악학교 입시를 포기
졸업을 앞둔 최승희는 이제 집안에 부담이 되지 말아야 하며,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어서 집안을 일으키는 데에 힘을 보태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 여학교를 나온다고 나왔지만 앞으로 어찌할지 내겐 전혀 방향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어떻게든 취직을 해야겠다, 그리고 일가의 생계에 다소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승희, 1936, , 12)
그도 다른 동창들처럼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다른 우등 졸업생들처럼 일본 유학도 가고 싶었다. 때마침 숙명여고보의 교원회의에서는 최승희에게 일본 유학 장학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 모교의 교원회의의 결정으로 나를 학교 급비생(給웰生)으로 동경 음악학교에 입학시키도록 되어 있었는데, 나이가 어린까닭에 하는 수없이 열여섯 살의 봄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서는 일 년 동안 놀고서 동경에 가라고 하셨다. 음악 교사인 김영환 선생은 그중에도 나의 음악가 될 소질이 있다고 보시고 ‘너는 꼭 음악가가 되어라’ 하셨다.” (최승희, 1937, , 12)
최승희는 숙명여고보 재학시절 ‘창가를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노래 솜씨가 좋았다는 말이다. 가 최승희에 대한 첫 보도를 내면서 “승희씨는 학교시절부터 성악을 잘해서 학우들부터 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고 보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최승희 자신은 성악가가 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여학교의 졸업 성적은 우등이었고, 그 중에서도 창가를 꽤 잘했습니다. 학교에서 무슨 행사가 있을 때에는 으레 내가 독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가를 꽤 잘한다고 해서 장래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최승희, 1937, , 32)
그렇지만 음악교사 김영환의 강력한 권고와 숙명여고보 교원회의의 유학 제안, 그리고 집안에 더 이상 부담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최승희는 도쿄의 음악학교 유학을 고려해 본 것 같다. 그러나 고려는 고려로 끝났다. 연령 미달로 응시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 하지만 그 기쁨도 한 순간이었습니다. 너무나 빨리 여학교를 졸업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나이의 부족으로 도쿄 음악학교에 들어갈 만한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래도 열여섯 살이 되는 봄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입니다.” (최승희, 1936, , 33)
최승희가 도쿄의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지원했다가 ‘연령 미달’로 낙방했다고 서술한 평전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우에노 음악학교의 학칙에는 연령을 제한하는 규정이 없었다. 다만 입학 응시 자격을 5년제 중학교(여성은 고등여학교) 졸업자 또는 그에 준하는 학력을 가진 학생으로 제한했는데 이것이 간접적으로 연령을 제한할 수는 있었다.
일본의 ‘구제중학교령’에는 5년제 중학교와 고등여학교 입학을 12세 이상으로 제한하는 규정이 있었다. 따라서 고등여학교를 졸업하면 17세가 되었고 이것이 간접적으로 음악학교의 연령기준이 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숙명여고보 졸업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만14세였다. 연령 제한 때문이었다면 ‘집에서 일 년 동안 놀고서’도 음악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대신 일본 여학교에 편입해서 1년을 더 수학했다면 음악학교 입학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나이 그 자체가 아니라 나이와 연동된 조선과 일본의 학교 제도의 문제였던 것이다.
일제가 조선의 학교 연한을 일본보다 낮게 정한 것은 그 자체로도 교육상의 차별이었지만 조선 학생들이 일본 고등교육을 받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조선인 학생들이 일본 대학에 가려면 먼저 일본의 중학교나 고등여학교에 편입해 1-2년의 수업연한을 채워야했던 것이다.
결국 최승희는 모교에서 대학 진학 장학금을 얻고도 도쿄의 음악학교에 응시조차 하지 못한 것인데, 그것은 연령 미달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 학교의 제도상의 간격 때문이었던 것이다.
2020-07-19
-
국민공감을 생각한다
© 세종타임즈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란 말이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뜻이지만 어떤 사실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둘러대서 하는 말로 쓰인다. 한마디로 제멋대로 임기웅변식이다. 오죽하면 이 말이 등장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이 언어를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말이 맞는가 싶기도 하다가는 살펴보면 어딘가 석연치 않다. 이른바 궤변(詭辯)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다. 얼핏 들으면 옳은 것 같지만 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억지로 둘러대어 합리화시키며 허위적인 변론을 하는 것이다. 비슷한 말로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있다. 온당한 이치도 살피지 않고 가당치도 않는 말을 끌어다가 자기주장이나 조건에 맞도록 합리화하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더 나아가 지록위마(指鹿爲馬)는 아예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으로 얼토당토않은 것을 우겨서 남을 속이려하고 할 때 쓰이는 말이다. 이는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대는 황당한 말을 일컫는다.
요즘 대한민국은 이런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지난 16일 개최되었던 '이재명 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공판에서 '친형 정신병원 강제입원 시도 건' 관련한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유포를 제외한 3건에 대해서는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벌금 300만원인 원심을 파기하고 고등법원으로 환송 조치했다. 고등법원으로 원심 파기•환송 조치된 '친형 정신병원 강제입원 시도 관련 허위사실 유포 건'의 심리 결과는 무죄 7명, 유죄 5명으로 김명수 대법원장을 제외하면 6대5로 유•무죄 관련 의견이 맞섰다. 대법원이 일률적인 법적 책임 묻고 이에 대해 수사권이 작동하면 수사기관 중립성 훼손우려와 자유로운 토론에 장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는 논리이다. 일방적으로 적극적인 허위사실을 공표하지 않는 한 처벌하기 어렵다며 무죄취지로 파기환송을 한 것이다. 물론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해야 하지만 사실 이날 생중계까지 하며 진행된 선고공판은 범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수진영에서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TV 토론에서의 거짓답변도 '표현의 자유' 범주에 포함시키고, 공개되는 TV 토론에서의 답변을 공개적인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공표'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며 공직선거법상 TV토론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아주 좋지 않은 판례를 남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대법원의 선고이후 국민적인 신뢰가 많이 무너져 내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치적인 판결이지 법적인 판결로 공감을 얻기에는 어딘가 1인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반기는 측은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사필귀정이라는 말까지 사용하며 환영하고 있지만 이는 역사의 평가로 남게 되었다.
요즘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성추행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2차 가해가 극성인 가운데 피해자를 매도하는 발언이 방송을 버젓이 타고 있다. 도대체 무슨 연유에서 피해자를 조롱하고 매도하는 발언이 등장하는지 그 심리상태가 의심되지 않을 수 없다. 충남에 이어 부산, 서울까지 이어지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정치적인 편향성을 갖고 언어폭력으로 2차 가해에 편승하는 것을 보며 상당수 국민들이 공분하고 있다. 이들 은 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로서 또는 검사로서 변호사로서 쏟아놓는 언어들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심각성이 매우 크다.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사고를 갖춘 사람들이 편파성을 갖지 않아야 하는 것이 공적인 방송인이나 공인의 자세이다. 방송의 경우 편견과 사견이 지배하면 이는 공적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사회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언론은 그 자체가 불공정한 언론임에 다름 아니다. 그 누구든지 궤변이나 지록위마식의 언어구사로는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거짓을 진실인양 포장한다고 수긍할 수 있는 그런 시대는 지났고 국민들의 수준도 그게 아니다. 언어와 사고에 있어 상식이 통하고 정상적인 방식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품격 있는 노력은 언제나 그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특히 법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여야 한다. 법이 권력 앞에 무력해지면 그 권력의 주인인 국민이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평범한 진리가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하다. 법의 잣대가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이 되어서는 결코 정의가 바로 설 수 없다. 법과 양심이 존재하는 사회와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서민들은 사소한 도로교통법만 어겨도 과태료를 문다.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은 정치자금법, 공직선거법, 기타 각종 법을 크게 어겨도 법망을 벗어나고 감옥에 가도 훗날 사면복권을 통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참으로 불공평하지 않느냐 하는 볼멘소리도 들리고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적용도 그동안 성토의 대상이 된지 오래이다. 법위에 군림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이는 정의가 아니다. 사회지도층에서 국민들의 등불이 되어 정의로운 사회를 이끌어가야 함에도 변칙과 반칙의 사회를 조장한다면 이는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것이며 국민들을 배신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작금에 대한민국 사회의 크고 작은 많은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처럼 정치와 이념이 대립하는 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이분법적 분열과 반목의 악순환이 멈추질 않고 있다. 국민들은 대한민국이 과연 이대로 가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 조차 의아해 하고 있다. 그야말로 가치관과 정체성 혼돈의 시대이다. 이현령비현령, 궤변, 견강부회가 판을 치고 있다. 심지어 지록위마의 거짓도 난무하고 있다. 어딘가 숨어서 음험한 작당과 권모술책을 꾸미지는 않는지 의심의 눈초리가 번뜩인다. 집단이기주의는 날로 심해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민심도 흉흉하다. 마스크는 쓰고 다니지만 복불복(福不福)이라고 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잠재적 장소가 식당과 대형마트, 관광지, 지하철, 대중교통 등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위난의 시기일수록 카멜레온의 탈을 벗어버리고 법과 질서, 양심을 가다듬고 정도를 걸어가고자 하는 사회지도층의 각성과 사회대통합의 거대한 용트림이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국민 공감의 길이자 대한민국이 바로 서는 길이 아닌가 싶다.
2020-07-19
-
자살은 안 된다
© 세종타임즈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전 세계의 독보적인 1위이다. 2020년 복지부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 10만 명당 자살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2018년 26.6명으로 2017년보다 2.3명 늘어났다. 그것도 2003년 이후 OECD 국가 중 12년 연속 자살률 1위이다. 2018년 자살자수는 하루 평균 자살자 수는 38명이나 된다. 노인자살률도 1위이다. 심지어 청소년들의 자살률도 심각하다. 연령대별로 보면 자살자 수는 50대(2812명)가 가장 많고, 자살률은 전반적으로 연령대가 높을수록 증가하여 80세 이상(69.8명)이 가장 높다. 연령대별 자살률은 OECD 회원국 중 30대와 70대 이상 연령층에서 가장 높다. 청소년(10~24세) 자살률은 8.2명(2016년)으로 열 번째로 OECD평균(5.9명)보다 1.4배나 높다. 65세 이상 노인자살률은 53.3명(2016년)으로 OECD회원국 중 가장 높고, OECD평균(18.4명) 보다도 2.9배 높다. 자살의 이유로는 10~30세는 정신적 어려움, 31~60세는 경제적 어려움, 61세 이상은 육체적 어려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자살률이 세계에서 최고로 높게 나타나는 나라이다. 이런 불명예를 무려 10년 넘게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안고 산다. 자살예방이라는 처방을 내놓고도 엄청난 국가적 사회적 손실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사회 지도층의 자살은 엄청난 사회적 충격파를 던져왔다.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은 거명하지 않더라도 인기연예인부터 기업인,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최근에는 경주시청의 철인3종 경기 선수가 상습구타와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해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조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목불인견이다.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인기연예인들의 자살도 때로는 SNS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 때문에 빚어지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무엇보다 유명 정치인들의 자살은 그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유명 정치인의 자살은 그동안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왔다. 이는 역사에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동경의 대상이 되는 화려한 삶과 명예를 갖고 있는 공인들의 자살은 누구보다도 국민들의 정신건강에 직격탄을 던지게 된다. 자살의 이유가 그 무엇이든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천륜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참으로 허망함을 던져준다.
사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늘 행복하거나 즐거울 수만은 없다. 희로애락이 늘 상존하며 인생을 고해와 같다고도 했다. 솔로몬 왕은 잘 먹고 잘 살았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던진 말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토로했다. 그야말로 인생무생이다. 그 헛된 삶 속에도 파란만장한 이야기들이 내재한다. 비록 헛된 인생을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결코 헛되지 않은 삶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돈과 명예, 권력 모든 것을 쥐고 흔들며 최고의 순간을 누리는 것 같지만 무가치하게 이를 활용한다면 그 헛됨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하지만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모든 이들의 등불이 된다면 이는 기쁨과 보람이 배가될 것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절망 속에서도 오늘의 희망을 잃지 않고자 하는 깊은 뜻과 가치가 담겨있다. 생로병사의 길은 인간이면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해가 뜨고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황혼을 맞게 된다. 모든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잘났던 못났던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좌절과 자포자기, 절망의 순간들이 없을 수는 없다. 누구나 잘잘못이 있을 수 있다. 인생의 시행착오와 실수, 오류는 늘 있을 수 있다. 고뇌도 있을 수 있다. 막다른 골목이나 벼랑 끝에 서 있을 수 있다. 주변의 질시와 비난도 있을 수 있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싶다. 잘하면 칭찬도 받지만 잘못을 하면 꾸중도 들을 수 있다. 늘 칭찬만 받을 수는 없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아무리 고통스런 환경에 처하더라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솔로몬의 말처럼 극복하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어느 영화의 한 구절에 ‘절망보다는 차라리 분노가 낫다’라는 말이 있다. 자살이라는 절망은 결코 사회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추구해야할 가치가 아닌 것이다.
오늘날 코로나19의 암울한 사태가 젊은이들의 취업대란 물론 기존 직장인들의 실직대란까지 불러오고 있다. 자영업자들은 긴급재난지원금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 장사가 불황을 겪고 있다. 그나마 생활 속 거리두기라고는 하지만 지역감염이 확산되는 요즘 모두가 불안한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야말로 혹독한 환경에서 삶을 지탱해 나가고 있다. WHO는 현재 상황에서 코로나 19는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이 지속된다는 이야기이다. 지금 그 어떤 것 하나 희망적인 요소들이 보이질 않는다. 심지어 부동산정책에 이르기까지 서민들은 숨 막힐 정도이다. 취업을 통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젊은이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가정을 책임지는 서민들은 경제난으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즘 이른바 ‘투잡·쓰리잡’이 유행이다. 몸이 부서져라 뛰고 또 뛰는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이 난국을 견뎌내고 있다. 절망보다는 차라리 분노를 택하고 있다. 비록 30대의 자살률이 높고 50대의 자살자수가 많은 나라이지만 말이다.
자살은 생명체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 행위를 일컫는다. 하나뿐인 소중한 생명을 끊는 행위, 영원한 이별을 쉽게 선택하는 것은 안 된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이번 서울 시장의 자살은 그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처럼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국민들을 ‘멘붕’에 빠져들게 하는 자살은 공인이건 개인이건 그 어떤 이유로든 정말 안 된다. 심각해져가는 자살률 1위 국가의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시금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긍정적 사회분위기 조성과 삶의 질 향상 등 특단의 대책이 절실한 시점이다.
2020-07-12
-
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1
© 세종타임즈
가난을 뚫고 졸업은 했으나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숙명여학교를 8년이나 다니고도 진로가 막막해 지자 최승희는 견디기 어려웠다. 물론 그는 최선을 다했다. 도쿄의 음악학교에도 진학하려고 했고, 경성사범학교 입학시험에도 응시했다. 둘 다 실패했지만 그것은 최승희의 동기가 약했거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주 변하는 학교 제도와 어려웠던 가정환경 탓이었다.
우선 최승희의 숙명여고보 졸업이 그 학교에 입학했던 것 못지않게 대단한 일이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넉넉하던 그의 집안이 여고보 1학년 시절에 몰락했기 때문이다. 부재지주였던 아버지 최준현은 지방의 농지를 모두 잃었고 수창동 134번지의 기와집마저 빼앗겨 체부동 137번지의 초가집으로 이사했다. 넉넉한 살림으로 네 자녀에게 신교육을 시킬 수 있었던 최준현은 갑자기 끼니 걱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최승희는 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집에는 승일이 오빠가 밤을 새워가며 써서 받는 원고료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수입이 없었다. 그 원고료라는 것도 불과 몇 푼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루에 두 끼의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아침밥 때가 되면 부모님과 우리형제들은 서로 밥을 사양하면서 먹지 아니하였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학교 걸상에 걸터앉아서 어머니는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내게 밥을 먹이시던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다.”
부유하게 살다가 가난해진 사람이 가난을 견디기 더 어려운 법이다. “소학교를 다닐 때에는 아무런 부족함과 궁색함이 없이 따뜻한 비단 이불과 요위에서 세상의 괴롭고 마음 아픈 불행이라는 것을 도무지 모르면서 지냈”던 최승희가 “하루에 두 끼의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가난을 어떻게 견디면서 학교까지 다닐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최승희의 집안은 왜 몰락했던 것일까? 대부분의 평전들은 최준현의 경제적 몰락을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설명했다. 최준현이 일제 당국에 농토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1912년 8월 토지조사령 발표되면서 시작되어 1918년 5월의 조선임야조사령으로 마무리되면서 그해 말까지 모두 끝났다.
최준현이 토지조사사업 때문에 몰락했다면 1918년이나 그 이전에 타격을 받았을 것이고, 최승희는 보통학교에도 입학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준현은 1922년까지 최승희를 사립 숙명여학교에 보냈을 뿐 아니라 도쿄 니혼대학에서 유학하던 장남 최승일에게도 학비와 생활비를 보낼 수 있었다.
일부 평전 저자는 최준현의 몰락을 개인적인 이유에서 찾았다. 다카시마 유자부로(1959:14)는 최준현이 “다른 사람들의 모략에 걸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모두 잃었다”고 했고, 정병호(1995:23)는 “아버지의 무능과 방탕”이 원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도 그것이 어떤 ‘모략’이었고 최준현이 어떻게 ‘무능’하거나 ‘방탕’했는지 서술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는 최승희가 그의 일어판 에서 밝힌 바 있었다.
“도련님으로 자라셨고 사람만 좋으셨던 아버지는 남의 모략에 걸려 빚보증을 서시거나 토지 매매에서 계략에 말리시는 바람에,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셨다.”
최준현이 몰락한 이유는 ‘빚보증’과 ‘토지사기’였다. 사람 좋은 최준현은 친척과 지인들의 ‘빚보증’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연대 보증을 선 채무자가 돈을 갚지 못하면 보증을 선 최준현이 갚아야 했다. 다른 재산이 없던 최준현은 남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땅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근대식 계약에 서툴렀을 최준현이 토지매매 과정에서도 형식적 절차를 챙기지 못했고 다른 사람에게 일임했다가 사기를 당해서 토지를 모두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닥친 집안의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한 것, 그리고 결국 숙명여고보를 우등으로 졸업한 것만 보더라도 최승희가 의지력이 굳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020-07-12
-
성대한 졸업식 우울한 졸업생 4
© 세종타임즈
최영희의 혼인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신여성으로서 구습에 얽매인 시가에서 현모양처로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혼하고 친가로 돌아왔는데, 부친 최준현이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을 보면 그가 신시대의 새 조류를 이해할 만큼 마음이 열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준현은 막내딸 최승희가 취학연령에 이르자 숙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시켰고, 그대로 고등과에 진학하도록 했다. 최승희는 부모와 형제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린나이와 작은 몸집으로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고 학교생활도 원만했다. 최승희는 영민한 모범생이었다.
제17회 졸업식이 최승희의 첫 숙명 졸업식은 아니었다. 그는 1922년 3월23일의 숙명 13회 졸업식에도 참석했었다. 그때는 숙명 여자‘보통학교’ 졸업생 23명 중의 한명이었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할 때에 학교 제도의 변화로 약간의 문제가 생겼었다.
1922년 총독부는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해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일본인들이 다니던 소학교와 같은 6년으로 늘렸다. 따라서 4년제 보통학교 졸업자들은 2년의 학력을 보충하고 나서 고등보통학교(=중학교)에 입학하도록 제도가 변했다. 그러나 최승희는 2년의 보습(補習)기간을 건너뛰고 숙명여고보에 바로 진학했다. 최승희의 보통학교 성적이 우수해서 보습과를 이수할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해 4월5일과 6일에 치른 숙명여고보 입학시험에 합격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최승희는 1922년 4월15일 80명의 동기들과 숙명여고보에 입학했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26년 3월23일, 76명의 동기들과 이 학교를 졸업하게 된 것이다.
눈앞에서 진행되는 엄숙하면서도 성대한 졸업식에도 불구하고 졸업생석에 앉은 최승희의 마음은 무거웠다. 졸업 후에 할 일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숙명여고보 졸업생 76명의 진로는 그해 3월7일의 와 에 보도되었다.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학교에 진학하는 졸업생이 39명, 일본 유학이 13명, 각종 국내 전문학교에 진학자가 5명, 교원 취업자가 2명, 그리고 졸업과 함께 혼인하는 학생이 16명이었다. 두 신문에 발표된 명단이 완전히 같은 것을 보면 아마도 숙명여고보에서 직접 배포한 명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로가 결정된 학생들의 수를 합해 보면 75명밖에 되지 않는다. 76명의 졸업생중에서 졸업 후 진로가 정해지지 않은 졸업생이 딱 1명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최승희였다.
그는 졸업과 함께 혼인할 계획이 없었고 학교나 회사나 관공서에 취업할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는 경성사범학교 연습과에 응시했고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낙방했다. 숙명여고보 교원회의에서는 최승희가 성악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되면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도쿄의 음악학교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을 보류했다고 한다.
최승희는 제17회 숙명여고보 졸업생 중에서 앞길이 막막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다행히도 답답한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그날 밤 최승희의 운명을 결정할 만남이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2020-07-05
-
코로나 전파속도가 빨라진다는데
© 세종타임즈
코로나19 전파속도가 빨라지는 모습이라는 방역당국의 발표가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해외유입확진자와 지역감염, 집단 감염의 확산 정도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생활 속 거리두기라는 이름으로 사회활동자체를 막지는 않았지만 이마저도 장기간에 걸친 피로감에 젖어들고 있다. 이런 때문인지 이 틈을 타고 수도권에 이어 대전 그리고 광주, 대구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2차 감염확산의 우려가 높아가고 있다. 여기에다 미주와 유럽, 카자흐스탄 등 아시아 지역 등지로부터 들어오는 해외유입 확진자들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안팎으로 난리가 아니다. 이러다가는 이른바 n차 감염의 연결고리가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실제 이런 현상들이 대전과 전주, 광주, 대구 등지에서 발현하고 있다. 확진자들이 계속 추가되어 꼬리를 무는 형국이다. 예전 대구 신천지 상황과는 또 다른 양상이다. 학생들조차 감염이 이루어져 대전은 물론 충남북, 대구, 서울, 부산 등 곳곳이 난리가 아니다. 발생지를 중심으로 부랴부랴 역학조사가 펼쳐지고 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 정말 답이 없다. 이달 들어 국내 신규확진자는 하루 50명을 초과하고 있고 4일 0시 기준 63명이나 증가했다. 누적확진자가 1만3천명을 넘어서고 있다.
여기에다 확진자가 나온 기업들은 사옥마저 폐쇄조치하고 나섰다. KT는 지난 2일 확진자가 근무한 서울광화문 사옥을 폐쇄했다. 역시 LG유플러스도 지난 2일 확진자가 나온 대전오류사옥을 폐쇄했다. 삼성SDS도 지난 2일 확진자가 나온 잠실 사옥을 폐쇄했다. 전 직원이 재택근무를 실시하고 있다. 최근들어 대기업 중심의 확진자가 이어지고 재확산 조짐까지 보이면서 그 파장이 만만치 않다. 대전에서는 감염자 역학조사 도중에 모 의원에서 6명의 확진자가 추가되었고 광주 모 교회에서도 신규확진자가 6명이 추가되었다. 이들 신규확진자들은 다른 발생지역과의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관련 조사가 진행 중이다. 연쇄 고리 형태를 보이면서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는 코로나19는 공식발표만 있을 뿐 사실상 확산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매우 크다. 그야말로 재수 없으면 전염된다는 식이다. 알아서 조심하라는 식이다. 식당이나 대중교통에서도 여전히 안하무인의 무책임한 모습들이 자주 목도되고 있다.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 때문에 곳곳에서 추태가 자주 목격된다. 제주도 관광객을 포함해 확진자들의 상당수가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뒤늦게 판정이 나고 그동안에는 이곳저곳에 마구 퍼트리고 다니는 형국이다. 확진자들의 동선을 보면 그렇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런 때문인지 코로나 전파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눈만 뜨면 코로나 확진자 추가 소식을 접하고 있다. 재난문자로도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다. 지하철이나 시내버스, 철도 등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이다. 주변에서 기침소리만 나오더라도 금방 자리를 피해버린다. 도무지 주변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여기에다 무더위에 마스크착용도 보통 답답한 것이 아니니 시민들의 피로감이나 짜증도 가중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일선 현장의 의료진들이다. 방호복을 입고 그야말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연일 확진자들이 찾아오고 있으니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무더위와 싸워야 하고 감염자나 접촉자들을 대상으로 한 진단검사에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보건소 선별진료소도 의료진들의 여름철 환경을 개선하며 장기전에 대비하는 모습이지만 코로나 확산세 속에 의료진들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코로나19가 우리 사회 전반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백신이나 치료제가 나올 때까지 막연하지만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만용이나 방심은 그야말로 금물이다. 코로나의 일상은 마스크착용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제는 어린이까지 생활화되어 있다. 무더위에 어른들도 답답한데 어린이들은 얼마나 답답할지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데도 일부 식당들은 여전히 거리두기는커녕 마치 코로나가 끝난 것처럼 무질서하기 그지없다. 좌석을 정리해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과 비교해도 아주 대조적인 모습들을 보게 된다. 보는 사람도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곳에 확진자 한명이라도 다녀가면 그 식당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초토화되고 있다. 대전지역에서도 한 지역의 주변 식당들을 확진자가 누비고 다니는 바람에 일대 식당들이 폐쇄조치하고 난리가 아니다. 이런 현상은 전국 각 시도에서 유사하게 벌어지고 있다. 일단 확진자들이 발생하면 그 사업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폐쇄된다. KT, LG, 삼성SDS 등 대기업들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학교도 한 두 명이라도 발생하면 전교생이 비상이다. 제대로 수업이 진행되지 못한다. 대전의 경우 초등학교에서 첫 감염사례가 발행해 비상이다. 특히 대전의 확산세가 심상치 않다. 지난 15일 다단계 방문판매업소를 중심으로 재확산된 이후 누적 확진자가 계속 늘고 있는 것이다. 학교 안팎의 감염가능성이 커지면서 선별적 등교중지가 아니라 모든 학교 등교중지를 단행해야 한다는 학부모들의 목소리도 거세지고 있다. 교내 감염사례가 발생에 대한 불안감 때문으로 당연한 반응이다. 이처럼 전국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코로나로 인해 무더운 여름철을 맞아서도 불안감이 날로 증폭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당국은 국민들을 위한 방역수칙 준수를 외치면서도 정작 해외유입자 차단이나 지역 확산 방지를 위한 선결조치 내지는 후속조치에는 왜 미온적이냐는 비난도 거세지고 있다. 해외유입 확진자들을 왜 그토록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른다는 것이다. 먼저 감염원을 차단하고 나서 확산을 방지해야 하는 것이지 감염원을 계속 증가시키면서 확산세가 줄어들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작금의 확산세는 자칫 2차 대유행으로 번지면서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는 이유이다. 전 세계적으로 모범적인 방역이라고 자화자찬하던 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다. 장기간에 걸쳐 코로나와의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들의 지친 모습만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붓기식이다. 국민들도 허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방문판매업계는 물론 종교시설이나 체육시설, 콜센터, 학교 등 코로나가 거치지 않는 곳이 없다. 지역감염 확산 속도마저 빨라지면서 불안감도 더욱 증폭되고 있다. 재난문자가 전달되면 오늘은 또 어느 곳에서 확진자가 몇 명이나 더 발생했는지 그들의 동선은 어느 곳인지를 확인하는 시민들의 마음은 마냥 불안하다. 혹시나 자신들의 동선과 겹치지 않았는지 살핀다. 이런 코로나19 사태로부터의 해방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코로나가 변종이 발생하고 속도마저 빨라진다고 하니 무엇보다 방역수칙을 더욱 철저히 지키는 일이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모두가 더욱 조심하고 더욱 자중하며 집단감염의 우려가 높은 다중집합장소를 가급적 피하는 길이 최선의 방책이 아닐까 싶다. 전파속도가 빨라진 코로나의 감염과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항상 방심과 무모한 만용은 금물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2020-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