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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은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다.
▲ © 행복세종타임즈
연극을 흔히 종합예술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정작 연극의 요소에는 ‘배우 ․ 희곡 ․ 관객’ 셋 밖에 없다. 관객이 연극의 요소에 반드시 들어가는 이유는 비교적 간단하다. 화려한 무대장치를 보여주거나 연출과 배우가 아무리 훌륭한 연극을 만들었다 해도 그걸 봐 주는 관객이 없다면 막은 결코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이 극장을 찾는 이유는 첫 번째 오락을 찾기 위해서일 것이고, 두 번째 뭔가를 ‘얻기’ 위해서일 것이고, 세 번째 ‘자극’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처럼 ‘오락적 ․ 교육적 ․ 자극적’ 이유 때문이라 말할 수 있지만 좋은 연극이 되려면 관객들을 고루 만족시키기 위해 이 세 가지 이유들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
일반 대중들은 앞서 얘기한 세 가지를 얻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하지만 연극을 보려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현장성’의 경험에 있다. 지금 이 순간 배우의 현존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것도 흉내 낼 수 없는 연극의 매력이다. 이렇듯 직접성 속에서 집단 경험이 이루어지며 관객들은 영화나 TV에서 느끼지 못하는 새로운 경험을 얻게 되는 셈이다.
관객을 단순히 ‘관람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해선 안 된다. 관객은 재정적 후원자의 역할도 담당한다.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원금에 의존하거나 티켓 판매를 하는 것이다. 극단이 지원금에 의존하는 목적은 흥행에 실패했을 경우 그 부담을 줄이고, 저렴한 가격으로 연극을 제공함으로써 대중화를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연극은 대중에게 친근하지 못한데다 관람료마저 영화보다 비싸다. 따라서 일반 대중은 한 편의 연극을 보기보다 스케일이 훨씬 크고 값싼 영화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연극을 보는 게 가장 유익할까? 연극을 보는 방법은 정말 따로 있는 걸까? 이들 물음에 답은 “없다.” 연극을 관람하는 데도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진 않다. 작품을 올릴 때 연출은 분명히 표현하려는 ‘무엇’이나 그 이유다운 이유를 갖고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그건 연출의 생각일 뿐이며 관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했다고 하여 ‘틀렸다’고 지적할 순 없는 일이다. 연극을 자주 접하지 못한 관객이라 해도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의 눈은 예리하고 냉철하다. 서투른 배우의 연기를 보면 교감이 되지 않음을 느끼고 냉정할 정도로 무관심하거나 속으로 야유를 보낸다. 그건 곧 관객이 ‘장면 관찰자’로서의 역할까지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출의 의도가 뭘까, 저 배우는 무엇을 표현하려는 걸까 고민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대로 느끼면 되는 것이다. 슬프면 슬퍼하고, 기쁘면 기뻐하고, 무서우면 무서워하고, 울고 싶으면 옆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울 일이며 그렇게 순간 무대를 보며 즐기면 되는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객석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오늘 공연 보길 참 잘 했다’고 느꼈다면 그 공연은 좋은 공연이었을 것이고 ‘에이, 이게 뭐야 ~ ’란 생각이 들었다면 그 건 별로였을 것이다.
배우로서 내 공연을 보고 간 사람들이 그 공연을 생각할 때 마다 행복해 했으면 좋겠다. “그 공연 다시 안 해? 너무 좋았는데”라는 말을 들으면 설레기도 한다. 좋은 배우, 좋은 연극은 배우와 연출이 만드는 게 아니다. 당연히 좋은 희곡으로 ‘배우, 연출, 관객’이 하나가 될 때 의도치 않게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곧잘 질문한다. “연기를 잘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질문에 난 이렇게 답한다. “연기는 시스템도 아니고 특별한 방법도 없으며 그냥 자기 자신이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2015. 12. 08.
2015-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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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고르기를 마친 후 유일하게 찍은 사진 한 장..(보이는 컨테이너가 우리의 첫번째 살림집 이었다.)
▲ © 행복세종타임즈
그렇게 도착한 정선, 스므골 ...
주변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 그 자체 였다.
간혹 바람이라도 불어 숲이 흔들리면 바스락 거리는 숲 소리가 정적을 깨우는게 고작 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우선 집기며 살림살이를 컨테이너 살림집으로 옮기기 시작 했다.
나는 연신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무슨 말이라도 나올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의외로 담담하게 살림살이를
정리하며 때론 좌우를 둘러보는 여유도 부리며 그렇게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 이었다.
온 종일 정리를 마치고 저녁시간...
촛불을 밝히고 저녁상에 마주 앉았다. 도시에서의 그 어떤 훌륭한 음식이 놓인 만찬보다 근사한 식탁 이었다.
밤 하늘엔 별들이 쏟아지고 산과 들에서는 풋풋한 향내가 진동 했으며 풀 벌레 소리는 멋진 오케스트라가 되어
우리의 만찬을 축복해 주었다.
그날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의 우리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했고 계획도 세우며 정선에서의 첫 날밤을
그렇게 보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바로 우리의 살림집인 컨테이너 하우스의 보수공사를 시작 했다.
사실 전날 밤에 얼마나 춥던지...
딱히 난방 시설이라고는 장작 난로가 고작이고 바닥은 차가워 그 당시 유행하던접이식 싸구려침대를 구입하여 간신히 새우잠을 잤으니 추울만도 했다. 장작도 부족했고 무엇하나 변변한 것이 없으니 추운것은 어쩌면 당연 했다.
더구나 도시생활에서의 편리함에 익숙해 있던 우리로서는 추위는 가혹한 형벌같이 느껴졌다.
특히 아내는 더욱 힘들고 고달펐으리라 생각 되었지만 의외로 잘 견뎌 주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앞으로의 삶에 대해
무척 걱정을 많이 했었을 것이다.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우선 주변에서 장작이 될 만한 나무들을 그러 모으는 일부터 마치고 추위에 대비한 보강공사를 해 나갔다.
이사 오기전 마땅히 머물 숙소가 없어 고민 하던중 컨테이너로 대체하면 이동성도 좋고 여러모로 편리하니 그렇게 해 보라는 지인의 소개로 주변 카센터에서 쓰던 중고 컨테이너를 헐 값에 사들여 집 터에 가져다 놓았다. 그것도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옮겨온 컨테이너 였다.
길이 험하고 개울을 건너야 하는 어려운 현장 여건 때문에 운반이 덜미를 잡고 말았다. 사람들은 길도 험하고 개울 건너는 일 등을 두고 안 된다고 포기 하라고 말렸지만 당시로는 방도가 없었고 우격다짐 이라도 운반을 해야만 했다.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운반을 감행했다. 어차피 이곳에 온것이 미친짓이라고 생각 했던 만큼 더 미쳐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컨테이너를 실은 운반 트럭과 포크레인이 합동 작전을 (?) 전개해야 했다. 밀고 당기며,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컨테이너를 제 자리에 옮겨 놓을 수 있었다. 내 고집의 승리 였다. 아니 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다는 굳센 의지의 결과였다.
그렇게 마련한 컨테이너 하우스...
하지만 추워서 잠을 자지 못 한다면 큰 일 이었다. 아직은 봄이라 해도 조석으로는 쌀쌀함이 옷깃을 여미게 했으며 더구나 산 속에서의 추위는 일반 도시의 그것과는사뭇 달랐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내에겐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사전에 내려와 내부는 그런대로 완성을 해 놓은 상태였다.
씽크대도 만들고 이불장이며 신발장,선반등...그것도 나무자재를 사용하여 친 환경소재로 그럴듯 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단열재도 듬뿍넣고 하여 보온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그렇게 단단하게 대비 하고 했지만 산 속의 추위는 그리 만만한게 아니었다.
문틈이며 창틀 주변등 바람이 들어올 만 한 곳은 철저히 손보고 하여 그런대로 작업을 마쳤다.
다시 밤이 찾아왔고 차가운 밤공기는 온 산골로 퍼져 나갔다.
장작난로는 지글거리며 활활 타올랐고 바람 들어 오는곳도 없었다. 훈훈한 가운데 잠자리에 들었다. 이젠 됐다 싶었다.
한데 또 문제가 생겼다. 장작이 잘 타는것은 좋은데 너무 빨리 타 버리는 바람에 자다가 일어나 장작을 넣는것이 문제였다.
공기 조정기로 불의 강약을 조정해 주어도 별 효과를 보지 못 했다. 잠이 들만하면 일어나 장작 보충을 해야하니...
그것도 서너번은 깨어야 아침까지 무사히 설 잠 이나마 잘 수 있었다.이젠 별 방법이 없었다. 빨리 여름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그리고 빠른 시간안에 우리의 집을 짓는 방법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또다른 문제가 발생 했다.
화장실이 없다는 것 이었다. 할 수 없이 다급한 대로 앞에 있는 빈집의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수 밖에...
다행이 집 건너에는 오래전에 지은 허름한 집이 있었는데 여름에만 휴가 기간에 별장으로 사용하는 도시사람 소유의 집 이었다. 우선은 그곳을 사용 하기로 하고 화장실 짓는 일부터 착수하게 되었다.
화장실에 대한 웃지 못 할 일이 있었다.
때는 이월 말 경... 무척 추운 겨울 이었지만 4월 중순에 이사도 해야하고 집지을 자재며 공구도 미리 챙겨야 했기 때문에 자주 정선에 와야 했었다. 그때마다 잠 자리 때문에 항상 불편을 겪었고 불편 해소를 위해서는 컨테이너를 보수하여 임시거처라도 시급히 마련 하는것이 급선무 였다.날씨는 추웠지만 컨테이너 내부 수리를 위하여 공구를 챙겨 간신히 선잠을 자며 작업을 했다.
혼자 있으니 누가 챙겨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근근히 끼니를 챙기며 일 을 해 나갔다.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근 일주일이 넘는 작업기간 동안 생리 작용의 해결을 위해서는 화장실은 필요 했다.대충 아무곳이나 살펴서 해결하면 되기도 했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여 앞집의 화장실을 주인의 사전 허락도 없이 무단 사용하게 되었다.
화장실은 깨끗했다. 정리도 잘 되어 있고 깔끔하게 사용 하였다. 하지만 똥통에 문제가 있었다.
지난 여름 다니러 와서 사용을 하긴 한 것 같은데 내용물이 꽉 차올라 간당간당 수준 이었다.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고 급한대로 볼 일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매일 이용 하다보니 추운 날씨라 넘칠 염려는 없었지만 산처럼 솟아 오르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마치 한라산이 솟아 오른것 처럼 뾰족하게 산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도저히 쭈그리고 앉을수가 없었다. 똥 산이 엉덩이를 치받으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데 급하니 어정쩡한 자세로 볼 일을 보았다. 그리고 무사히 일 을 끝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힘도 들었을 법 한데도 일을 마친 후련함에 다음 일은 생각치도 않고 다시 일에 몰두 하였다. 아니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다음날 드디어 문제가 터졌다. 도저히 앉을 수 없게 똥탑이 쌓여 있으니 도저히 볼 일을 볼 수가 없었다. 급한대로 삽을 가져와 똥탑을 퍼 보려 했으나 꽁꽁 얼어버린 똥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함마와 곡괭이까지 동원하는 대공사(?)를 하게 되었다.
우선 함마로 내려치니 워낙 똥산이 밋밋하여 똥가루만 날리고 끄떡도 하지 않았다.상황이 그러니 다시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휙~ 곡괭이가 똥탑을 찍는 순간 똥 덩어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하~~....
옷 이며 얼굴 이며 곡괭이를 내리칠 때 마다 예고도 없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멈출 수 는 없었다.
왜냐하면 볼 일은 봐야 했기 때문 이었다. 똥탑은 드디어 무너지고 내 몰골은 만신창이가 되었다.하지만 치열한 똥탑과의 싸움에서 드디어 승리를 쟁취(?) 했다.ㅎㅎㅎㅎ... 아무튼 그놈의 똥탑 때문에 스타일 확~ 구긴 하루였다.ㅎㅎㅎ...
그 일, 즉 똥탑을 허물고 다음부터는 화장실 가는 일이 즐거웠다나 ㅎㅎㅎㅎ...
어쨌든 열심히 작업을 한 결과 컨테이너 내부 공사가 무사히 끝이 났다. 똥탑과의 싸움도 끝이 났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난다.
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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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
▲ © 행복세종타임즈
‘부어라~ 마셔라~’ ‘한잔 더, 한잔 더!’ 술이 술을 먹는 12월이 돌아왔다. 우리나라 12월 술 소비량이 연간 소비량의 절반이라고 한다. 송년회라는 말 대신에 ‘술년회’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다. 특히 우리의 술 문화를 살펴보면 원 샷 하기, 돌려 마시기, 폭탄주, 2차·3차 가기 등 과격하게 즐기는 것들이 많다. 이 모든 것들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문화다. 과도한 음주는 우리 몸의 간, 대장, 심혈관, 위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각종 모임과 회식자리가 많은 연말에 내 간을 보호할 수 있는 조그만 요령과 과음 후 숙취를 해소하는 요령을 알아보자.
첫 번째는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매일같이 술 마시는 것은 좋지 않다. 만약 과음을 했다면 적어도 2~3일은 쉬어야 간세포의 해독기능이 살아난다.
두 번째는 공복에 술을 마시는 것은 되도록 피하고, 안주는 기름이 많은 육류보다는 담백한 음식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권장하는 안주는 생선찌개, 해산물, 샐러드, 과일 등이다. 또한 짜고 매운 자극적인 음식은 피하는 것이 좋다.
세 번째는 술은 천천히 마셔야 한다. 원 샷 하기, 폭탄주 마시기는 피해야 한다. 맥주나 음료수의 탄산에 소주나 양주를 섞어 마시게 되면 체내 흡수력이 높아져 간독성이 훨씬 높아질 수 있다.
과음을 하고나서 숙취에 좋은 음식은 복어, 북어, 대구 같은 생선탕이 좋다. 라면, 짬뽕과 같은 맵고 자극적은 음식은 오히려 위장에 더욱 부담을 주게 되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또한 콩나물, 브로콜리, 미나리, 토마토, 오이도 숙취에 좋은 음식이다.
가장 좋은 숙취는 충분한 수면과 수분공급이다. 과음으로 인한 전해질 부족과 탈수는 충분한 수분섭취를 통해 보충해주고, 양질의 수면을 통해서 몸의 리듬을 회복해주는 것이 제일 좋다.
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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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감증 국회의원
▲ © 행복세종타임즈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불감증이란 말이 있다. 안전불감증과 도덕불감증, 부패불감증, 성불감증 등이다. 불감증(不感症)이란 말은 말 그대로 감각이 둔하거나 익숙해져서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일컫는다. 사실 성적(性的))인 용어나 심리학 용어로 쓰이고 있지만 여기에 수식어가 따라 붙으면서 안전불감증, 도덕불감증 등으로 안전이나 도덕에 대한 무감각과 질타성(叱咤性)) 의미가 함축된다. 그래서 불감증이란 말에 어떤 접두어를 붙이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 현상과 사안에 대한 줄임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성적용어 이외로서의 용어로 활용범위가 넓어졌다.
일부 국회의원이란 자들이 최근 또는 그동안 벌였던 일련의 사건 및 사태들을 불감증이란 용어로 축약해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공인의 행태를 정리해 보자. 먼저 신기남이란 국회의원의 사례이다. 경희대 로스쿨 졸업시험에 낙방한 아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학사행정에 개입하여 세간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다. ‘아들 로스쿨 구제 청탁 및 압력’ 의혹은 고발대상으로 아마도 관련 사안에 대한 수사도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의원이란 신분으로 자신의 아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하였다는 사실 자체부터가 참으로 사려가 깊지 못한 행동이다. 로스쿨 관련 학생들은 물론 국민들의 비난이 거세다. 국민이 위임한 국회의원이란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자식을 해당학교 로스쿨 졸업시험에 통과시켜 변호사를 만들려고 한 이런 못된 행동에 불감증을 붙여본다면 공인의식불감증과 부정부패불법불감증, 직무불감증, 수치심불감증이다. 4선의 중진 국회의원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간 직무를 수행하면서 이것 말고도 다른 청탁 버릇이나 압력 행위가 타성이 되어 이른바 청탁불감증에 젖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해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는 그럴만한 연조가 있는 중진의원이 ‘공과 사’ 조차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가관행위는 또 있다. 국회에서 ‘하늘아래 딱 한 송이’란 자신의 시집을 남의 회사 신용카드체크기까지 동원하여 판매한 국회의원인 노영민 의원의 황당 행위이다. 국민들은 아연실색했다. 정당대표의 비서실장까지 하고 국회 산업자원위원장이란 중차대한 직책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하게 됐는지, 머리가 있는 사람인지 그 인격과 공인으로서의 수준을 국민들은 의심하고 있다. 얼마나 좋은 시집이고 얼마나 필요한 시집인지는 모르지만 장사꾼이 되어 판매인지 강매인지 모를 행위를 한 것이다. 그것도 국회에서 버젓이 자행했다는 사실에 모두가 경악하고 있다. 낯이 두꺼워도 이렇게 두꺼운가. 이것을 후안무치(厚顔無恥)라고 한다. 수치심불감증과 도덕불감증이 극치를 이룬다. 자신이 책장사인지 국회의원인지 사리분별조차 하지 못하니 국민들만 억장이 무너진다. 이것은 부패불감증에 다름이 아니다. 국회의원이란 직분을 이용한 이런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자신의 책이름처럼 ‘하늘아래 딱 한 사람’이다. 국민과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고 올곧은 일을 생각해야 하는 국회의원들이 불감증의 정도가 이 모양이니 정말 한심하다. 이런 함량미달인 이런 사람이 국회의원과 산업자원위원장으로 중책을 맡고 있었으니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는 격 이었다. 무슨 일이 제대로 되었겠는가 싶다. 모두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청탁불감증 사례도 있다. ‘윤후덕의 따뜻한 동행’이란 책을 펴낸 윤후덕 이란 국회의원도 지나온 삶이 고스란히 담겨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2011년도 출판기념회의 기사가 인터넷을 장식하고 있다. 항상 낮은 자세로 따뜻한 동행을 강조하며 참으로 훌륭한 인사로 포장되어 있다. 이대로라면 정말 국민들의 박수가 늘 끊이질 않고 지역구인 파주에서도 찬사가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2년 전인 2013년 자신의 딸이 자신의 지역구에 있는 LG디스플레이의 경력 변호사 채용에 합격하는 과정에서 회사 측에 전화를 걸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고발까지 당했다. 당사자도 사과를 했다. 안 들켰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이것은 직권남용죄와 뇌물죄도 적용된다고 한다. 아무튼 청탁불감증과 도덕불감증, 부패불감증, 국민불감증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따뜻한 동행인지 묻고 싶다. 작은 것도 침을 튀기는 해당 정당도 어쩐 일인지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어물쩍 넘어갔다. 한마디로 목불인견(目不忍見) 이다.
이처럼 이런 저런 비리와 부패로 개망신을 당한 국회의원이 19대 국회에서 20명이 넘는다고 한다. 적지 않은 숫자이다. 이들은 법의 심판대에 올라 감옥에 갔거나 현재 진행형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이들은 이른바 정당의 검증과정인 공천심사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다. 하지만 검증이 무색할 정도로 각종 불감증으로 얼룩져 대한민국의 제 19대 국회가 만신창이 되어버렸다. 어떤 사건이 벌어질 때가 돼서야 생소한 얼굴을 접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한마디로 “처음 보는 얼굴이네! 저런 사람도 있었어?”이다. 그런데 매스컴에 제법 알려진 불감증 국회의원들은 아는 만큼 국민들의 분노가 더욱 치민다. 머쓱하고 씁쓰레한 얼굴표정과 이중성 민낯이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그동안 속았다는 국민들의 배신감이 더욱 크다. “저 사람마저”란 탄식을 국민들은 토로(吐露)한다.
내년 총선에도 갖가지 공천심사조건을 갖다 붙이고 마치 최상의 후보자를 내세우는 양 요란을 떨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그동안 지역감정에 기대고 기득권에 기대어 반사이익을 챙겨온 국회의원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니 제대로 검증이 될 리가 없다. 국민들도 그동안 학연, 지연, 혈연 등에 얽매이지는 않았는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 참으로 역겨운 불감증 국회의원들의 민낯을 보게 한 책임이 스스로에 있다. 총선을 앞두고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는 여야 그 어느 정당을 막론하고 대대적인 자기혁신이 절박하다. 허구 헌 날 그 밥에 그 나물이면 안 된다. 불감증 국회의원들이 다시 국회에 입성하고자 한다면 언감생심(焉敢生心) 꿈조차 꾸지 못하도록 철저한 검증노력이 필요하다. 19대 국회는 모든 면에서 한마디로 졸작이고 낙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가오는 20대 국회는 성숙하고 수준이 높은 국회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잃었던 국민들의 신뢰를 되찾고 정치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정치개혁, 정당개혁은 필수이다. 국민들의 날카로운 시선조차 불감증이면 안 된다. 국민배신의 불감증 국회의원들을 과감히 솎아내야 한다.
201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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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이여 힘내라
▲ © 행복세종타임즈
대한민국이 '헬조선'임을 보여주는 화면이 인터넷에서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헬조선(Hell朝鮮)이란 2010년에 등장한 대한민국의 인터넷 신조어인데 헬Hell:지옥과 조선朝鮮의 합성어로 '한국이 지옥에 가깝고 전혀 희망이 없는 사회'라는 의미다. 특정 커뮤니티의 극소수의 네티즌들이 사용했으나 언론이 쓰면서 더 알려지게 되었다.
지난 1일 오후 한 트위터 사용자는 트위터에 60개의 뉴스 방송 화면을 모아 올렸다. 각 방송화면에서 전하고 있는 뉴스는 , 등 한국의 열악한 삶의 질을 보여주는 통계의 화면을 사진으로 올렸다. 이 사람은 트위터에서 "한국이 놀라운 60가지 이유, 정말 놀랍다고 하면서 "이 외에도 최저 수면시간, 가계부채 증가율, 국가 부채 증가율, 산업재해 사망, 교통사고 사망, 실업률 증가율, 사교육비지출 등 이삼십 여 가지가 더 있는데, 동영상 보도를 찾기 어려워서 뺐다"고 설명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삶의 질이 최악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사회에선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이른바 '3포세대'도 등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즈음은 한발 더 나아가 3포세대가 아니라 '희망'과 '꿈'마저 내려놨다고 '7포세대'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한 취업포털 사이트가 2030세대 2천 8백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명 중 1명은 자신을 이른바 '5포 세대'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한배를 탔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생태적 한계를 극복하기는 좀처럼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위해서는 '같이 잘해보는' 길밖에 없다. 열심히 노력하면 나도 남들처럼 잘 살 수 있다. 희망이 없는 사회는 참 불행한 사회이지 않는가.
그런데 이때 모두 함께나 '모두 같이'가 취하는 방향이 매우 중요하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성장을 명목으로 경쟁과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황폐한 사회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이제 비인간적일 뿐 아니라 비효율적 시대착오라는 진단에도 모두 공감하고 있다. 그런 방식이 내세운 '파이 키우기'나 '낙수효과' 같은 정치적 수사를 말하는 정치인조차 냉소의 대상이 되는 오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제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기운이 좀체 응집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금 이 사회에 실제로 존재하는 붕괴 직전의 위태로운 삶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만한 여유가 없는 것이다. 개개인의 불안이 증폭되어 이제 각자 알아서 살아남기 식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예전의 새마을운동처럼 “같이 잘살아보자 같이 잘해보자”로 바꾸기 위해선 사회여론을 선도하는 오피니언opinion leader들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희망이란 위를 보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사회학자들이 진단하는 한국사회에서 갈수록 부富의 파이를 차지한 이들이 흘려보내는 부스러기 자체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이것을 바꾸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선순환구조로 바꾸는 근본적인 변화란 언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변화여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변화라는 가정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를 말할 것이다. 일 년 내내 이슈가 되고 있는 ‘갑질횡포’의 속사정도 알고 보면 사회적 보편타당성이 결여된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희망이란 위를 보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래의 민초들이나 미생으로부터 채워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래로부터 변화를 이끌기 위해선 바로 위의 계층인 오피니언들의 올바른 역할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피니언이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나 태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기 때문이고 언론의 대부분은 이를 취재하여 선도그룹의 변화를 보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못된 60가지가 있다면 우리가 잘하는 60가지도 있다. 잘못된 것도 고쳐야하지만 긍정의 60가지는 우리의 희망이다. 부끄러운 우리의 그늘도 노력으로 양지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을 우리의 희망으로 만들자.
지금 우리는 날이 갈수록 청년실업은 꼬리를 물고 그 위세가 크다. 하지만 오피니언들이 다시 한 번 혁신을 통해서 창조경제에 불을 붙이는데 동참할 수 있다면 모든 하위그룹도 이에 동조하여 희망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국가는 이들에게 희망을 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기업인들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창조혁신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희망은 밑에서부터 자라고 채워지는 것처럼 오피니언들의 희망가가 전체로 울려 퍼지기를 빌어마지 않으며 분발을 촉구한다, 우리 모두 인문학적인 성찰로서 한 사람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한 사람을 위하여 횃불을 밝혀보자. 분명 그 앞에 희망이 자라고 있을 것이다. 오피니언들이여 힘내라, 분발해라 그대들이 우리의 희망이다.
2015-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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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의 산골사는 이야기
▲ © 행복세종타임즈
첫 발자국
2003년 4월 15일 새벽 4시30분 ...!
싸늘한 공기를 가르며 새로 구입한 1ton 트럭의 경쾌한 금속성이 새벽을 깨우고 있었다.
화물칸에는 나머지 이삿짐이 가득 실려 있었고 우리 부부는 혹시 잊은것이 없는지 집 안팍을 이리저리 둘러 보았다.
모든 것이 이상없이 잘 마무리가 되었다.
두 아들 에게도 오지 말라고 했다.공연히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출발만 하면 된다.
우리 부부는 차에 올라 그간 살던 정든집을 뒤로하고 서울을 떠나고 있는중 이었다.
어찌보면 빚쟁이에 몰려 새벽에 아무도 몰래 도망치듯이 그렇게 서울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긴 세월 그래도 정 붙이며 살던 그런 곳 이었지만 우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정선으로의 첫 발자국을 그렇게 내 디뎠다.
아직 사방은 캄캄했고 인도에는 가끔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외에는 그나마 차분한 시간 이었다.
그렇게 조용한 시간의 터널을 뚫고 서서히 서울을 빠져 나왔다.
중부 고속도로로 접어들 즈음 사방은 천천히 어둠속에서 깨어나고 있었고 저 멀리서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차를 타고 출발한 후 우리는 한마디의 대화도 없이 트럭의 금속성과 어두움을 익히며 그냥 그렇게 내 달렸다.
중부고속도로를 지나 어느덧 영동 고속도로 분기점에 접어 들고 있었다.
차창밖 으로는 봄기운이 완연한 찬란한 아침이 어느새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동안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을뿐, 그동안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막상 가보지도 않았던 강원도 정선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오랜 침묵 끝에 내가 말을 걸었다.
" 여보... 괜찮아..."
아내는 별 이상 없다는듯
" 나는 괜찮아..."
하고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한편으론 미안한 생각에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단호하고 경쾌하게 대답해 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차는 영동 고속도로를 달려 문막 휴게소에 도착 했다.
우리는 아침 식사겸 휴식을 위해 휴게소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아침 식사로 소머리국밥을 한그릇씩 비우고 자판기에서 커피도 마시며 조금씩 마음을 편안하게 안정시키고 있었다.
약 30분간의 휴식을 끝내고 다시 정선으로의 갈 길을 재촉 했다.
새말 인터체인지에서 국도를 따라 안흥 찐빵 마을을 지나 점점 도로가 험해지는것을 느끼며 평창을 지났다.
산세는 점점 가파라지며 도로는 꾸불꾸불 춤을 추었고 오르락 내리락을 수차례, 어느덧 정선의 관문격인 비행기재 터널을
지나 점점 정선속으로 빨려 들어 가고 있었다.
자연의 신비는 극치를 이루었고 봄기운으로 물이 오른 산과 들은 연한 녹색의 향연을 뽐내고 있었다.
간간히 보이는 나즈막한 농촌의 집들은 정겹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느새 차는 가리왕산 자연 휴양림을 지나 정선 읍내로 들어서고 있었고 자그마한 시골도시의 정겨움이 우리를 따뜻하게
환영해 주는듯 했다.
정선읍을 지나 약 20분경...
우리는 드디어 우리가 살아갈 약속의 땅 입구에 도착했다.
하늘은 맑고 높은 하늘엔 새털구름이 멋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곳 입구에서 목적지 까지는 약 30분...!
비포장도로에 그것도 산길, 길 이라야 경운기가 힘겹게 다닐 정도의 잡초가 우거진 길 아닌 길을따라 개울을 7군데를
건너야 우리의 최종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길은 돌 투성이의 거친길 이었다. 꼬불꼬불 산길을 돌고 돌아 속세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기라도 하듯 개울을 지나
비틀비틀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 한발한발 더디게 다가갔다. 좌우로는 우거진 숲으로 사열하듯 빼곡했고 하늘은 숲에 가려
가끔 힐끔 거릴뿐 침침한 숲 터널을 한참을 더듬어 올라가야했다.
드디어 저멀리 빼꿈히우리의 터전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울을 떠나 4시간여 만에 우리의 목적지에 어렵게 도착할 수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고 봄볕은 따사로웠다. 숲 사이로뚫린 하늘은 푸르다 못해 푹 빠지고 싶을 정도로 맑고 깊었다.
숲속에선 이름모를 산새들의 합창소리가 우리를 환영이라도 해주는것 처럼 소란 스러웠다.
아니면 이 조용한 산속 자신들의 보금자리에 왠 불청객이 나타나 무슨일인가 궁금해서 그런지도 모를일 이었다.
우리 부부는 따사로운 햇살의 축복과봄날의 싱그러움속에 마음의 짐을 털어 버리고 최종 목적지에 첫 발자국을
내딛게 되었다.
2015-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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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을 넘어 행복사회로 가자
▲ © 행복세종타임즈
대한민국 사회의 갈등구조는 늘 있어 왔다. 건전한 사회를 향한 사회 구성원들의 목소리는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라 생각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에는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가 있으며 이를 법적으로 보호한다. 이익집단이나 단체들이 집회를 갖고 시위를 하는 것은 비단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러한 행동은 집단행동이라고 한다. 이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용어로서 국민들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집단행동으로 부당한 처사에 대한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적법한 절차와 행동이 수반되는 것이고 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마스크는 그동안 집단행동 현장에서 침묵시위의 상징이자 평화적인 시위로 표방되어 왔다. 그래서 마스크에 ‘X자’를 넣고 무언의 시위를 하는 장면들을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어찌 보면 백 마디 말보다도 더 강력한 호소력을 지녀왔다고 생각한다. 갈등 속에서도 평화를 그려내는 지혜가 엿보이는 시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얼굴을 감춘 폭력 집회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정부도 단호해졌다. 엄단하겠다고 공표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집회 시위문화는 언제부터인가 정치적인 색깔이나 이념적인 색깔이 드러나면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상당히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가 순식간에 폭력이 난무하고 무슨 불상사가 생기면 본질을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책임을 전가하고 비방전이 전개된다. 또 다른 사회갈등만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애꿎은 시민들과 국민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철도파업이 그랬고 지금의 민주노총 등의 대규모 집회가 그렇다. 반민주와 정권퇴진을 외치며 살벌한 폭력행위가 등장한다. 국민들도 깜짝 놀랐다. 물 폭탄을 쏟아 붓는 공권력의 과잉진압 때문에 경찰차를 때려 부수고 대응을 했다고 주장하며 불법 폭력을 합리화하고 있다. 참으로 기이한 ‘아전인수’격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미 경찰도 정보력을 갖고 대응을 준비한 모양새이고 집회 주체 측들도 폭력 행위를 할 수 있는 쇠파이프 등을 사전에 준비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물 폭탄으로 과잉진압하기 때문에 폭력행위가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경찰버스를 끌어내는 밧줄을 준비했단 말인가. 사전 모의가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과연 공권력의 과잉진압인가도 살펴볼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어찌하여 이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왔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국회는 무엇을 했고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정부는 이들이 내세우는 부당한 정책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면서 대화를 통한 민주적인 노력을 펼쳐왔으며 대한민국 민의의 장인 국회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무슨 대책을 세워왔는지 정말 궁금하다.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주역이 되어야 할 정부나 국회가 이들이 길거리로 나와 극단적인 의사표출을 해야 할 정도로 ‘나 몰라라’ 했다면 이는 참으로 엄청난 직무유기에 다름 아니다. 특히 국회와 정당들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엉뚱한 일에는 동작도 빠르니 맨날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국회의원 세비를 올리려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슬그머니 없던 일로 했다. 여기에다 예산 나눠먹기 행태를 음성적으로 벌이다가 들통이 나 종편방송의 뭇매를 맞았다. 내년에 이들이 또 국회로 들어오겠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해야 할 우선순위를 몰라도 한참 모른다. 이런 사태의 중재와 해결에 솔선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툭하면 국민, 서민, 시민, 행복, 민생, 청년, 장애인, 꿈과 희망 등 온갖 좋은 용어를 다 갖다 붙여 대기는 정말 잘한다.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선진국이지만 국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만큼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건건이 대립이다. 그러니 사회갈등을 봉합하고 중재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통하여 오히려 반사이익을 얻으려 하고 있다. 여당은 ‘불법폭력집회’라고 하고 야당은 ‘공권력의 과잉진압’이라고 옹호하는 세력으로 둔갑하여 논쟁을 벌여대고 있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참으로 모순된 민주주의가 아닐 수 없다. 회고해 보면 과거 민주화 열기에 편승하여 무수한 택시들이 길거리에서 파괴되고 무질서의 부작용이 터져 나온 것도 1987년의 또 다른 사회상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그래도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전 국민적인 대의가 함께 했던 시절이다. 당시에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통령 직선제의 역사적 전환점을 맞은 민주투쟁승리의 개가도 올렸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지금 불법폭력으로 얼룩진 집회를 민주적인 집회와 시위라고 칭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지금이 과거와 같은 반민주, 반독재 군사정권 시대라고 한다면 오히려 우리 5천만 국민들이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인 자신들의 조국 대한민국을 향하여 반민주를 외쳐대니 시대착오적인 사오정 같은 구호가 아닐 수 없다. 반민주적인 행동인 폭력과 무질서 불법으로 난장판을 만들고 대립과 반목을 부축이며 우리 사회를 갈등구조로 몰고 가는 세력들의 저의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이런 세력들이 기득권 노동계층에 자리하고 귀족노조로 우리 사회를 재단하는 자들이 되어 마치 가난한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양 매화타령을 한다면 이는 크나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한 공장 파업사례를 소개해 본다. 신발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일을 하지 않는 파업이 아니라 파업기간 내내 한 켤레의 신발 중에 한 짝만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상품성이 없어 판매를 할 수는 없었지만 작업은 계속되었다. 이후에 노사가 서로 합의가 되어 파업을 마치고 나서는 나머지 한 짝을 제조하였다. 이 일화는 소모적인 파업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노사가 공히 상생하였다는 ‘지혜로운 파업’의 일화이다.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지기’식으로 파업이나 집회를 한다면 그것은 서로가 피해자만 낳게 되고 대화의 여지가 없다. 상생하는 길이 아니다. 그런 시행착오는 그동안 여러 파업을 통하여 너무나 많이 겪어왔다. 막가파식의 파업으로 서비스업종인 식당이 문을 닫고, 택시회사가 파탄이 나고, 호텔이 문을 닫았던 그런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이제는 지혜를 가질 때다. 비민주적인 방법으로는 그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그 누구도 갈등을 조장해서도 안 된다. 국민들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분명 모든 일에 있어 꿈과 희망을 갖고 긍정적으로 실현해나가는 과정은 생각처럼 그다지 쉽지 않지만 작은 데에서부터 이를 차분하고 지혜롭게 성취해나간다면 그 과정도 더욱 값지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꿈과 희망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좌절과 고통을 맛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새로운 내일과 미래를 탄생시키는 산고(産苦)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 기쁨은 더욱 배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갈등사회를 딛고 일어선 행복사회, 희망사회이며 이것이 바로 통합과 화합의 정신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건강한 대한민국의 사회상이다.
201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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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JP!
▲ © 행복세종타임즈
雲庭김종필(金鍾泌, 1926년 1월 7일 ~ )은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킬 당시 중령으로 정변에 참여했다. 박정희의 조카딸 박영옥과 결혼했으며 35세에 육군 준장으로 진급 후 예편했다. 9선 국회의원으로 최다선 국회의원 출신이며 제11대, 31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끌었으며, 민주공화당과 자유민주연합 등의 총재를 지냈던 분이다. JP김종필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 내내 흥미롭게 읽었다. 더구나 한국현대 정치사의 살아있는 증인의 증언을 듣자니 많은 감회가 있었다. 가난한 우리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고향인 충청도를 애향심으로 끌어안았다. 정치에 있어서 때로는 지혜를 때로는 뚝심으로 한 길을 가셨던 큰 어른이셨다. 살펴보면 말머리에 민주주의는 피가 아닌 빵을 먹고 자란다는 그 한마디가 바로 민심이요 천심이라는 것을 아셨던 분이다.
노자의 도덕경 70장에 보면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言有宗, 事有君, 夫唯無知, 是以不我知. 知我者希, 則我者貴, 是以聖人被褐懷玉이라 했는바 이는 내 말은 알아듣기 아주 쉽고 행하기도 아주 쉬운데 천하 사람들은 알아듣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는 구나. 말에는 근본 종지가 있고 일에는 중심이 있는데 오직 모르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를 이해하는 자가 드물고 그럴수록 나는 귀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겉으로 베옷을 입고 있지만 안으로는 보배로운 옥을 품고 있다고 했다.
노자의 본문이 때로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도의 우주론적 법칙 같은 형이상학적 측면을 말하고 있기는 이 글을 따지고 보면 무위자연의 법칙으로서 물과 같이 자연스럽게 혹은 겸허하게 살라는 소박한 충고로서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운정 김종필의 그랬다. 쉬운 말이지만 그 안에는 천둥번개가 있고 따뜻한 햇살과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있었다. 정치사가 어찌 영광만 있었겠는가. 하지만 자갈길은 자갈길대로 흙길은 흙길대로 마다않고 묵묵히 소이부답하며 걸어온 대인의 길이었다.
하지만 우리도 그랬다. 무위에 입각한 노자의 삶의 방식을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행하지도 못했듯이 세상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명리(名利)만을 추구하거나 화려한 외모나 형식에 더욱 치중을 하고 있다고 한탄만 했다. 왜 그가 산 그림을 그리고 좋아하게 되었는지 영국의 불세출의 정객 처칠을 왜 존경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아무리 장삼이사의 삶이라하더라도 우리가 너무 무심했다. 고향의 어른을 너무 오래 모른 채했다.
인간사 잘산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 ‘비고 고요한 마음(虛靜)’으로 하늘의 이치와 자연에 부응하는 간단한 삶의 원리인데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니 노자는 그것을 비유하여 “성인은 거친 베옷을 입고 있지만 속으로는 보배를 품고 산다.”고 한 것이다. 그야말로 ‘피갈회옥(被褐懷玉)’이다. JP의 회한은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는 태양이 되고 싶었다”지만 한일협정에 큰 보람을 갖는다고 했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가진 로맨티스트로서의 마지막 정객이다. 하는 말마다 지혜를 담고 그림을 그리며 예술인을 사랑하고 도와주었으며 행동을 하는데 절도와 절제를 알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한(無限)에 무한을 보탠다고 증가(增加)가 일어나지 않는다. 무한은 무한일 따름이다. 유한(有限)은 무한 앞에 소멸하는 순연(純然)한 허무다.
프랑스 사상가 파스칼의 말인데 JP가 특별한건 유한에도 그에 적합한 가치를 부여하고 긍정했다는 점이다. 유한은 그저 허무하지만은 않다. 완성과 충족 속에서 무한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JP는 우리에게 그걸 남겼다. 일의 성취 속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 말이다.
“내 정치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62년)과 DJP 후보단일화 결단(97년)을 들고 싶어요. 그 일엔 비난과 욕이 쏟아졌지만 역사의 전면에 서는 도전과 성취의 보람이 있었다”고 하면서 말을 마쳤다.
이제 자기의 갈 길을 알고 자기의 설자리를 알며 마칠 줄 아는 운정 김종필에게 우리 모두 기립박수를 보내자. 한없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자. 부디 행복하고 안락한 노후를 빌어마지 않는다. 문득 미국의 계관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귀가 떠오른다.
“눈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
이게 누구네 숲인지 알듯하다
그 사람 집은 마을에 있지
그는 모르리라
내가 여기 서서 숲에 눈 쌓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내 조랑말은 기이하게 여기리라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인가라곤 가까운 데 없는데
연중 가장 캄캄한 이 저녁에 길을 멈췄으니
말은 방울을 흔들어 댄다
뭐가 잘못됐느냐고 묻기라도 하듯
그 밖엔 오직 가볍게 스쳐 가는
바람소리, 부드러운 눈송이 뿐
숲은 아릅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201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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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뜻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 © 행복세종타임즈
터키의 러시아전투기의 격추로 인하여 세계 3차 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다는 뉴스들이 나오는 가운데 동해에서는 北 SLBM(잠수함 탄도미사일) 파편 발견되었다. 다행히 시험 발사는 실패한 듯이라는 CNN의 보도가 있었지만 매우 심상치 않은 사태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가는 오늘이다.
어느 경우에도 전쟁은 느닷없이 터지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경우도 전쟁 이전에 이미 38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다. 처음에는 고조되었던 위기감이 매번 반복이 되는 충돌로 인해 점차 무뎌지고, 비상경계 태세가 해제되는 순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임진왜란도 그랬다. 부산에 있던 대마도 사람들을 일본막부의 명령으로 철수시킨 것이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지만, 조선 조정은 이를 무심하게 넘겼다.
언제나 전쟁은 징후를 동반하지만 조선의 경우는 그것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통신사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견해가 엇갈려서 대비를 안 한 것뿐만 아니었다. 당파가 갈려서 전쟁을 무시하려고 한 것만도 아니었다. 그들은 전쟁을 대비할 때 올 정치적 부담이 두려워 전쟁을 애써 외면했다는 기록들이 엄연하게 존재한다.
국제정세가 이런 가운데 미국의 CNN이 국제 정세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CNN은 국제적으로 이슬람국가(IS)와 갈등의 골이 깊어진 상황에서 터키와 러시아 전투기 격추로 인한 제3차 세계대전 발발에 대한 심각성을 조명하기도 했다. CNN은 25일(현지시간) “이것이 제3차 세계대전이 아니면 무엇인가(How is this not World War III?)”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것은 마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상황과 유사하다”는 분석을 내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북한과 155마일의 전선을 가지고 있으며 호전적인 전쟁을 평소에도 입에 달고 사는 그들이기에 우리로서는 등골이 오싹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내놓아야 한다. 국민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정부가 할 수 있는 제반조치들을 점검하고 강구해야할 것이다. 또한 내달 5일 민중총궐기대회를 열겠다는 전국농민회총연맹에 대해 경찰은 '집회 불허'하고 전농'측은 다시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국내정세도 불안하다. 불교계의 화쟁위원회가 나서 중재를 서는 모양이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종교계 전체가 나서 평화롭게 마칠 수 있도록 중재하고 주최 측도 자제해줄 것을 촉구한다.
더구나 마땅한 전쟁억지력을 갖지 못한 우리로서는 외교라인의 점검도 필수적인 것이다.
사실상 전쟁억지력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우리를 침범했을 때 우리의 보복공격으로 인한 타격이 상대방 국가에게 있어서 치명적일 수준의 데미지를 안기는 수준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또한 선제공격을 받지 않을 국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국의 핵우산아래 있으므로 한미의 공조라인도 살펴 만약의 사태에 철저하게 대비해야할 것이다.
201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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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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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회가 민주주의의 꽃이고 모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자유와 질서의 개념을 먼저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미국사회의 아이덴티티(identity)는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켜온 민주사회의 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질서를 바탕으로 자유를 구가하며 오늘의 미국사회가 성장해 왔다. 물론 미국사회도 인종차별이나 노예제도 등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극복하며 오늘의 민주사회를 이룩해왔다. 아직도 완벽한 사회라고는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법과 원칙, 자유와 질서, 인권을 존중하며 세계평화를 주도해 왔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반미감정을 골을 들러내는 반대세력들을 제외하고는 미국사회의 평화와 질서는 모든 국가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갑자기 돌출하여 민주가 정착되고 자유가 넘치는 나라가 된 것은 아니다. 1776년 독립선언이 실질적 의미의 미국 역사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이들도 파란만장한 격동의 200년 세월을 보낸다. 그래서 탄생한 중요한 슬로건이 하나 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Free is not freedom.). 자유에는 분명히 민주질서가 내재되어 있으며 내 생각대로 혹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캠페인이 방송자막을 통해 늘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되 법과 원칙에 따른 민주질서를 중시하며 사회적 방종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는 그런 사회구조를 갖추어 나가고 있다. 이른바 민주주의의 기본에 충실하자는 사회적 콘셉트다.
우리나라 초등학교사회 그림 책명에 이런 것이 있다. ‘마음대로가 자유는 아니야‘란 만화그림책이다. 정치에 속한 민주생활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이 그림책은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민주적인 태도를 배우게 구성되어 있다. 알기 쉽고 참으로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초등학교 6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책인데도 우리 생활과 정치, 국민의 권리와 의무 등의 챕터로 나뉘어 성인들이 보아도 흥미롭고 자못 감동도 주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표현들이 오늘 우리 사회를 향하여 많은 메시지를 던진다. 기본적으로 ’민주적으로‘,’공평하게‘라는 개념을 등장시키되 여기에는 분명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있다. 이를테면 집안에 형제나 자매 오누이가 있는데 서로 의견이 달라 싸우는 스토리이다. 첫 시작은 원하는 놀이가 달라서 서로 싸우게 되는 그야말로 ’서로의 생각만 고집하고 싸우는 모습‘이다. 그러나 결과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들의 이야기와 민주적인 사고를 통하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도 소개하며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지를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하고 있다. 결론은 ’민주적으로 공평하게 정하여 놀기로 한 아이들‘이다. 여기에는 ’민주적으로‘,’공평하게’ 정하자는 슬로건이 등장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참으로 흥미롭고 시사를 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를테면 ‘공평하려면 다함께 쉬고 다함께 일해요’,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멀쩡한 물건을 망가뜨리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어린이는 마음껏 놀 권리는 있지만 할 일은 해야 한다. 내가 어지른 것은 치우고 숙제는 미리 한다’, ‘조금씩 양보하고 즐겁게 먹는 방법으로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 좋지만 다수결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는 사실도 적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 내가 누군가의 입장에서 특별히 살펴주는 것이 바로 배려‘라는 사실도 보여준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것은 주인인 ’국민이 다스린다‘는 것인데 누구나 누려야할 권리가 있지만 국민의 한사람으로 지켜야 할 의무도 있다는 사실을 만화로 서술하고 있고 이를 어린이들이 배우고 있다.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헌법 제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과 국민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즉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질서는 민주주의 이념이지 폭력과 무질서 불법 무법천지를 용인하다는 구절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폭력을 쓰고 법을 무시하고 사회질서를 해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민주질서를 해치고 나라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세력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이런 행위는 그 이유가 무엇이던 민주주의를 짓밟는 폭력 테러집단에 불과한 것이다. 적법한 절차와 적법한 행동을 근간으로 해야 한다. 내 맘에 안 든다고, 내 생각대로 안한다고, 쇠파이프로 경찰차를 때려 부수는 살벌한 폭력행동이 과연 올바른 민주적인 행동인지 묻고 싶다.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로도 얼마든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성토할 수 있는데 이런 전근대적인 행동까지 동원하며 대한민국 사회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 대한민국 사회가 민주주의를 그만두라는 말인지 공산주의 내지는 사회주의로 가야 한다는 것인지 그 정체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다중을 이용한 군중심리를 이용하고 도망자의 길을 가는 비겁한 행동으로 우리 사회의 법과 질서를 교란하는 자는 그 실체가 무엇이며 진정 대한민국의 정의와 올바른 역사를 위한 자인지도 분명 밝혀야 한다. 누구를 위하여 국민을 팔고 누구의 재산을 함부로 망가뜨리는지도 밝혀야 한다. 이들이 집회에 쓰는 돈은 과연 누가 대는지도 알고 싶다. 민주주의가 아직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앞서 소개한 초등학교 그림책을 사서 보라.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 개념을 제대로 알고 민주를 외치고 정의를 외치고 독재를 외쳐야지 도대체가 설득력이 없는 언행으로 무슨 민주와 정의사회,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아우성인가.
종교가 자비와 사랑을 가르치고 있지만 범법자들의 도피처가 되어서도 안 된다. 조계사에 민주노총위원장이 숨어들어 나오질 않고 신변보호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스토리인지 참으로 어안이 벙벙하다. 지난 번 철도파업 때도 그러고 이번 광화문 집회의 범법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나라의 범법자들의 도피처가 조계사인가 묻고 싶다. 그렇다고 한다면 앞으로 모든 범죄자들과 수배범들이 조계사로 숨어들면 이들 모두 신변을 보호해 주겠다는 말인지도 묻고 싶다. 아니 대한민국 사회를 뒤흔들어 놓으며 대한민국의 국법을 어긴 자를 신변보호라는 용어로 보호한다고 하면 이 나라의 법과 질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것인지도 또 묻고 싶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하여 투쟁한다면 도망갈 일이 아니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얼굴을 내밀고 국민 앞에 나서야지 절로 도망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참으로 궁금하다. 중재를 하면 법을 어겼어도 봐주라는 것인지 또 무엇을 중재하겠다는 것인지 또 누구를 위한 중재인지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지금 국민들은 신변보호라는 이유로 비겁한 도망자인 범법자를 자비를 내세워 보호하는 조계사의 처사에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쯤에서 다시금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미국사회가 강조하는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초등학교 그림책에서도 아이들에게 ‘내 마음대로가 자유는 아니야’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기본개념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아이들이 알고 있는 민주주의의 기본개념조차 모르면서 정의를 부르짖고 독재를 외치는 비민주적인 사람들이야말로 이율배반의 모순과 자가당착에서 벗어나 막말로 ‘너부터 잘해’고 ‘너부터 똑바로 해’라는 대상이 아닐 수 없으며 뼈를 깎는 자성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 거리낌 없이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고 ‘방종’이다. 민주사회의 자유는 책임과 의무가 뒤따르는 것이다. 이를 혼동하며 민주사회 질서를 교란하고 이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민주주의를 초등학교교과서에서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불법과 탈법, 폭력 등 비민주적인 투쟁으로 문제의 해법을 찾으려 한다는 이는 역사와 국민 앞에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한다. 우리나라 3.1독립정신과 이에 영향을 받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정신을 배우고 타산지석으로 삼아라.
2015-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