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환율 리스크와 대한민국의 선택

한·미 무역협정 체결 이후,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김헌태논설고문

2025-11-02 07:34:35

 

 

 

새 협정, 새로운 불안

지난 10월 말, 대한민국과 미국이 새로운 무역협정을 공식 체결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 복귀 후 처음으로 맺어진 양자 협정이자, 한·미 경제 관계의 향방을 가를 중대한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양국은 자동차, 반도체, 에너지 분야의 관세 완화와 투자 확대에 합의했지만, 협정의 이면에는 ‘미국 중심의 무역질서’라는 냉정한 현실이 숨어 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 수출기업의 기회가 확대될 것처럼 보이지만 시장 반응은 복합적이다. 협정 체결 직후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며 외환시장의 불안심리가 확산되었고, 외국인 자금은 단기 이탈 조짐을 보였다. 미국의 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달러는 여전히 강세를 유지한다. ‘금리 인하의 완화 효과’보다 ‘무역 불균형 심화’에 대한 우려가 더 컸다.

 

금리는 내려도 불안은 남는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경기 둔화를 우려하며 금리를 인하했다. 그러나 시장은 이를 ‘완화의 신호’로 보기보다 ‘세계 경기 둔화의 징후’로 해석한다. 달러 유동성은 늘었지만, 자본은 여전히 미국으로 몰리고, 신흥국 통화는 약세로 돌아섰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원화 가치 하락은 수입 물가를 밀어 올리고, 생활물가는 다시 국민의 체감 경제를 압박한다. 금리는 낮아졌지만 대출 이자 부담보다 더 큰 문제는 불안정한 환율과 물가의 이중고다. 경제는 수치보다 심리로 움직인다. 시장은 여전히 불안하다.

APEC 정상회의를 전후해 미국은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는 보호무역 노선을 다시 강화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다자체제는 힘을 잃고, 각국은 ‘자국 우선’의 깃발 아래 새로운 무역 장벽을 세운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의 숙명적 구조에서 환율 한파는 곧 서민의 삶으로 직결된다.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입 물가는 오르고, 서민 가계의 물가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무역의 명암, 서민경제의 그림자

이번 한·미 무역협정은 한국 수출 구조를 다변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미국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양날의 검이다. 자동차와 반도체 산업은 관세 인하의 수혜를 입지만, 농축산물·의약품·서비스 시장은 역으로 개방 압박에 직면한다.

수출 호조가 국민 체감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수출 대기업은 이익을 늘리지만, 내수·중소기업은 환율 불안과 물가 상승으로 고전한다. 달러 강세는 수입 물가를 자극하고, 전기·가스·식료품 가격을 끌어 올린다. 결국 환율의 파고는 서민 가계로 밀려와 ‘금리 인하의 효과’를 상쇄하고 있다.

 

외교와 경제, 분리할 수 없는 시대

무역과 환율 문제는 이제 경제를 넘어 외교 전략의 문제다. 미국의 통화정책 변화가 한국의 수출 구조와 금융시장을 직격하고, 그 영향은 정치·외교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APEC 정상회의에서 확인된 각국의 ‘자국 우선주의’ 흐름 속에서 한국은 새로운 외교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아시아 지역·유럽·신흥국 시장으로의 다변화를 병행해야 한다. 달러 의존도를 줄이고, 무역 구조를 다층화하지 않으면 환율 파고는 반복될 것이다. 단기적인 환율 안정 개입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무역 생태계’다.

 

외교·경제의 새 방정식

무역과 환율은 이제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외교의 언어이자 국가 전략의 바로미터다. 이번 협정은 한·미 간의 경제적 신뢰를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동시에 “한국이 미국 중심 경제권에 얼마나 깊게 편입되었는가”라는 우려도 남긴다.

미국은 이번 협정에서 자국산 에너지 등의 수출 확대를 관철시켰고, 한국은 첨단산업 분야의 관세 혜택을 얻었다. 그러나 ‘관세 인하’ 이상의 진짜 질문은 따로 있다. 한국은 이 협정 속에서 자율적 선택권을 얼마나 확보했는가. 경제 주권은 지켜지고 있는가. 외교·안보·경제의 삼각 구도 속에서 한국은 어느 방향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하는가. 지금이야말로 외교와 경제를 분리해 보던 시대의 착각을 거둘 때다.

 

신뢰의 경제, 일관성의 정치

경제의 본질은 신뢰다. 정책은 변할 수 있어도 원칙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조가 뒤집히고, 정부 메시지는 일관성을 잃는다. 이 불확실성이 외국 자본의 가장 큰 리스크로 작용한다.

이번 협정 체결 이후 시장이 불안한 이유는 단순히 환율이 아니라 ‘한국 정부가 얼마나 신뢰할 만한가’에 대한 물음 때문이다. 국내외 투자자들은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정책을 원한다. 그것이 진짜 환율 안정책이자 경제 안보의 첫 번째 장벽이다.

 

위기의 시대, 대한민국의 선택

대한민국은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한·미 무역협정 체결로 새로운 기회를 얻었지만 동시에 더 큰 의존과 리스크를 떠안게 되었다. 금리는 내렸지만, 불안은 남았고, 수출은 늘었지만, 민생은 여전히 팍팍하다. 이제 한국이 취해야 할 길은 명확하다.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 자주성, 외교적 동맹보다 경제적 실리, 숫자보다 국민의 신뢰다.

환율과 무역의 파고는 결국 선택의 문제다. 역사는 늘 위기의 순간에 나라의 방향을 가른다. 이번 한·미 무역협정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이 될지, 또 하나의 종속적 굴레로 남을지는 지금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다.
그 답은 경제의 수치가 아니라 국민의 마음속 ‘신뢰의 저울’ 위에서 이미 무겁게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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