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의 본질을 다시 묻다 “정치가 국민에게로 돌아올 때, 자치는 비로소 완성된다”

김헌태논설고문

2025-10-12 11:10:18

 

 

 

물밑의 소용돌이, 벌써 시작된 전초전

2025년이 저물기 전, 내년 지방선거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있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2026년 6월 3일(수)에 치러질 예정이다. 이 선거에서는 시·도지사, 교육감, 구·시·군의 장 및 지방의원 등을 동시에 선출하게 된다. 벌써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의 광역단체장 후보군이 속속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정치의 계절은 이미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 “시민을 위하겠다”라는 구호 속엔 정치적 셈법이 깔리고, “변화”를 외치는 목소리 뒤엔 권력의 욕망이 도사린다. 언론을 통해 쏟아지는 각종 공방과 폭로, 견제의 언어들은 마치 전쟁터의 포성처럼 들린다. 정치의 본무대가 아닌 지방의 현장이 권력투쟁의 전초기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정치는 본래 민심을 담는 그릇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현장은 민심을 담기보다는 쏟아내는 데 급급하다. 서로를 향한 ‘정치공격’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고, 시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위한 언어의 폭풍이 연일 몰아친다. 한때 주민의 삶을 책임지는 ‘생활정치’라 불리던 지방정치는, 이제 중앙정치 못지않은 대립과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그 안에서 주민들은 점점 멀어진다. 그들의 한숨이 깊어질수록, 정치의 언어는 점점 공허해지고 있다.

지방자치의 본질은 ‘권력’이 아닌 ‘생활’이다 지방자치의 출발은 ‘생활정치’다.
주민과 가장 가까운 행정이, 그들의 목소리를 가장 빨리 듣고, 작은 불편 하나도 함께 해결하자는 데에 그 뜻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지방정치는 어느새 중앙정치의 축소판이 되어버렸고, ‘주민자치’의 이름 아래 권력의 향배만을 쫒는 정치놀음으로 변질되었다. 시장과 군수, 도지사의 이름이 ‘민생’보다 먼저 회자되고, 당의 색깔이 행정의 원칙을 대신하는 일이 다반사다. 지방의회 또한 예외가 아니다. 감시와 견제의 기능은 정당의 이해관계 속에 퇴색하고, 정책보다는 정략, 논의보다는 공방이 앞선다. 지역의 문제를 논하는 회의 석상은 어느새 ‘당파의 전장’이 되어버렸다. 이런 현실에서 ‘지방분권’은 공허한 구호일 뿐이다. 주민의 삶을 바꾸는 행정이 아니라, 정당의 승패를 가르는 전장으로 변질된 자치의 현실— 그 속에서 우리가 잊은 것은 바로 ‘시민의 일상’이다.

 

정치의 언어는 약속이어야 한다

출사표는 단순한 정치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과의 약속이자, 공동체 앞에 내미는 신념의 증표다. 그런데도 많은 후보들의 출사표는 ‘공약’보다 ‘공세’로 채워져 있다. 상대의 약점을 들추고, 과거의 흠을 부각하며, 비난의 창끝으로 정치를 시작한다. 이것이 과연 시민을 위한 출발일까. 정치가 언어로 사람을 설득하는 행위라면, 지금의 언어는 신뢰를 세우기보다 불신을 쌓아 올리는 모래성에 가깝다. 정치인은 자신의 언어로 심판받는다. 말은 곧 품격이며, 품격 없는 정치에는 국민이 없다. 시민은 이미 수많은 약속의 잔해 위에 서 있다. 지켜지지 않은 공약, 책임 없는 발언, 변명으로 덮인 행정의 결과들— 그 모든 것들이 시민의 냉소를 불러왔다. 정치는 진실을 잃을 때 생명을 잃는다. 출사표의 언어는 다시 시민에게로 향해야 한다. 그 언어가 진심이라면, 그것이 바로 정치의 회복이다.

 

대립과 갈등의 정치, 그 끝은 무엇인가

지금의 지방정치는 ‘갈등의 정치’라는 이름으로 기록될 위험에 처해 있다. 서로를 향한 공격은 마치 일상처럼 반복되고, 정책논쟁보다는 감정의 충돌이 앞선다. 이는 단순한 정치행태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의 구조가 국민의 삶에서 멀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념과 당파가 행정을 지배하면, 행정은 곧 무너지고, 정책은 흔들리며, 주민은 방치된다. 이것이 바로 ‘정치가 실패한 지방’의 전형이다. 그 누구도 이런 현실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언론이 경쟁적으로 자극적 제목을 붙이고, 시민 역시 분열의 프레임에 익숙해진 사회의 분위기 또한 원인이다. 하지만 결국 책임의 무게는 정치가 져야 한다. 정치가 통합을 이끌지 못하면 공동체는 분열되고, 정치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 국민은 불안을 느낀다. 이것이 오늘의 지방정치가 마주한 냉혹한 현실이다.

 

주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로 돌아가야 한다

지방정치는 다시 ‘주민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지방선거의 본질은 권력 교체가 아니라, 주민이 바라는 삶의 변화를 선택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지금의 선거판은 주민이 아닌 후보가 주인이다. 주민은 ‘표’로만 존재하고, 그들의 목소리는 선거 이후에야 잊힌다. 이 악순환을 끊지 못한다면, 지방자치는 결코 성숙할 수 없다. 주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 그것은 곧 책임정치다. 선거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정치인은 당선 이후에도 주민의 곁에서 정책을 실현해야 하며, 그 결과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치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초다. 지방정치가 중앙정치의 하위기관이 아닌, 주민의 삶을 바꾸는 ‘생활의 주체’로 서야 한다. 이것이 지방자치의 회복이며, 정치의 본령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

변화의 바람은 언제나 ‘현장’에서 시작된다

지방은 늘 변화를 먼저 겪는다. 경제의 어려움, 복지의 사각지대, 도시와 농촌의 격차—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자 해결의 최전선이 바로 지방이다. 그렇기에 지방정치의 실패는 곧 국가의 실패로 이어진다. 지방의 리더들이 진정한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국가의 중심은 흔들리고, 국민의 신뢰는 사라진다. 이제 정치인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진정성은 구호가 아니라 실천에서 드러난다. 작은 행정개혁, 지역경제의 활성화, 복지의 사각지대 해소, 이 모든 것이 바로 주민이 체감하는 정치의 실체다. 그 길은 화려하지 않지만, 묵묵히 걸어야 할 정치의 본길이다. 정치인이 그 길 위에 서 있을 때,
비로소 주민은 정치의 희망을 다시 믿을 것이다.

 

미래를 위한 마지막 물음, “정치란 무엇인가”

지방자치가 시작된 지 30년이 넘었다. 우리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동시에 많은 후퇴도 겪었다. 이제 묻자. 정치란 무엇인가. 권력의 쟁취인가, 아니면 공동체의 약속인가. 정치가 ‘국민의 일상’을 지키는 일이라면, 오늘의 선거판은 그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치가 민심을 담고, 행정이 삶을 바꾸는 구조—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지방자치의 미래다. 정치는 결코 전쟁이 아니다. 정치는 설득이며, 협력이고, 책임이다. 출사표는 권력의 출발점이 아니라, 시민 앞의 다짐이어야 한다. 지방의 지도자들이 다시 그 초심으로 돌아간다면, 지방자치는 다시 희망의 이름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정치가 국민의 삶을 위한 것임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지방선거의 계절이 다가올수록 우리는 더 깊이 성찰해야 한다. 누가 당선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마음으로 출발하는가이다. 정치의 언어가 다시 국민에게 신뢰로 다가설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는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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