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에 무너지는 지도자의 품격, 권력은 왜 입을 조심하지 않는가

김헌태논설고문

2026-10-22 10:14:24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옛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지도자의 말 한마디는 천 냥 빚을 갚기는커녕 수십 년 쌓아온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기도 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공직자가 부주의한 표현으로 국민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뒤늦게 해명과 사과를 반복하는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은 정치 풍경이 됐다. 대한민국 정치에서 말의 무게와 지도자의 품격을 다시 물어야 할 때다.

최근 추미애 경기도지사의 이른바 '소방 재정 빨대' 발언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추 지사는 지난 10월 1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경기도 국정감사에서 소방 관련 재정 부담을 설명하면서 “소방이 가장 큰 골치 아픈 재정 빨대 같다”라고 발언했다. 국가직인 소방공무원의 인건비와 소방 관련 예산을 지방정부가 상당 부분 부담하는 재정구조를 지적하려던 취지였지만 표현은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소방관들의 헌신을 재정 부담에 빗댄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말은 발언자의 의도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삶과 처지, 사회적 맥락까지 함께 고려돼야 한다.

 

소방관은 재정의 빨대가 아니라 국민의 생명줄이다

소방관은 누구인가. 화재가 발생하면 모두가 빠져나오는 건물 속으로 거꾸로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생명을 구조하고 폭우와 산사태 속에서 위험에 처한 주민을 구하며 한순간의 판단으로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일을 수행한다. 그들에게 지급되는 인건비와 안전 장비, 구조·구급 예산은 단순한 지출 항목이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공공투자다. 재정의 효율성을 따지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방관의 헌신과 존엄을 가볍게 여기는 듯한 표현은 신중해야 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번 논란이 소방관의 순직이라는 비극과 시기적으로 겹쳤다는 사실이다. 경기도 부천의 공장 화재 현장에서 고 김진석 소방위가 순직했고 추 지사는 17일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과의 표현과 방식까지 논란이 됐다. 추 지사는 19일 국정감사에서 다시 공식 사과했고 20일에는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소방본부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자신의 잘못된 표현으로 상처를 준 데 대해 사과했다. 재정 문제를 설명하려던 의도와 별개로 표현의 부적절함을 인정한 것이다. 다만 순직 사고는 별개의 사건으로, 발언 논란과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사건이 겹치면서 소방관의 희생과 처우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더욱 커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마디의 실언이 여러 번의 사과를 부른다

이번 사태는 말 한마디가 어떻게 정치적 논란으로 확대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처음에는 소방 재정에 관한 발언이 문제였지만 이후에는 사과의 시기와 태도, 진정성까지 논쟁의 대상이 됐다. 더불어민주당 부승찬 의원 역시 19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경기도 국정감사에서 소방 예산의 지방자치단체 부담을 설명하면서 재정을 빨아먹는다는 취지의 표현을 사용해 논란에 휩싸였다. 부 의원은 20일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결국 민주당은 10월 21일 추 지사와 부 의원 모두에게 경고 조치를 결정하고 소방공무원과 국민에게 사과했다.

여기에서 지도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판단과 사회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 발언의 취지가 선했다고 해서 표현의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잘못된 표현 하나만으로 한 사람의 모든 정책과 공적 활동을 부정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실언을 인정하는 태도와 이후의 행동이다. 지도자의 진정한 품격은 실수하지 않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인정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데 있다.

 

역사에 남은 정치인의 말실수

대한민국 정치사에는 말 한마디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사례가 적지 않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60대와 70대 유권자들의 투표 참여를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발언을 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다. 젊은 세대의 정치참여를 강조하려던 발언이었지만 고령층의 참정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논란으로 번졌다. 정 의장은 노인단체를 찾아 사과했고 선거대책위원장직에서도 물러났다. 특정 세대의 정치참여를 독려하려다가 다른 세대의 존엄과 권리를 훼손하는 듯한 말을 한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정치인의 언행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당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려던 정몽준 의원의 아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에 국민을 비하하는 표현을 올렸고 정 의원은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이 사례는 정치인 본인의 직접 발언은 아니었지만, 사회적 비극 앞에서 사용된 경솔한 언어가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특히 재난과 참사 앞에서는 그 어떤 정치적 계산보다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공감과 존중이 먼저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대통령의 언어도 예외일 수 없다

2022년 윤석열 당시 대통령의 미국 방문 중 불거진, 이른바 '바이든·날리면' 논란 역시 정치지도자의 언어와 공적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촬영된 발언의 일부 표현을 둘러싸고 대통령실과 언론 사이에 해석이 엇갈렸고 관련 보도의 정확성을 놓고 법적 다툼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영상에 담긴 발언의 구체적인 단어를 둘러싼 해석에는 논쟁이 있었던 만큼 특정 표현을 실제로 말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이 사건에서 얻을 교훈은 논란이 된 단어 하나를 넘어 대통령의 언어와 공적 해명이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낳을 수 있는가에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처럼 공적 권한을 가진 사람들의 언어는 일반 시민의 사적인 대화와는 다른 책임을 수반한다. 그들의 말은 정책 방향으로 받아들여지고 행정조직에 영향을 미치며 국민에게는 국가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지도자가 특정 직업이나 세대, 지역, 계층을 가볍게 표현하면 해당 집단은 자신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다. 정치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말의 자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에 따르는 책임은 더욱 무거워진다.

 

말은 마음의 거울이며 권력의 민낯이다

예로부터 동양의 정치사상은 지도자의 언행을 중요하게 여겼다. 공자는 군자가 말에는 신중하고 행동에는 민첩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남겼다. 말보다 실천을 앞세우고 자신의 언어에 책임지는 자세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예절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의 기본 덕목이다. 지도자의 말이 가벼우면 약속의 무게도 가벼워지고 약속이 가벼워지면 국민의 신뢰도 흔들리게 된다.

우리 역사에서도 군주의 언행은 통치의 중요한 요소였다. 조선의 경연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서와 정사를 논하며 자신의 판단을 돌아보는 자리였다. 임금이라고 해서 모든 판단이 옳을 수 없다는 인식, 신하의 간언을 듣고 스스로를 성찰해야 한다는 원칙이 그 바탕에 있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에게도 같은 교훈이 적용된다. 권력이 크다고 해서 자신의 말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력이 클수록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지도자의 언어에는 국민의 존엄이 담겨야 한다

정치지도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이 가진 권력에 익숙해지면서 국민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달라지는 일이다. 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있거나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박수에 둘러싸여 있으면 반대 의견과 비판의 목소리를 불편하게 여길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을 낮춰 보는 표현이나 조롱에 가까운 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을 설득해야 할 지도자가 국민을 가르치거나 꾸짖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민주주의의 소통은 멀어진다.

소방관에게는 소방관의 존엄이 있고 농민에게는 농민의 자부심이 있으며 노동자와 장애인, 노인과 청년에게도 저마다의 삶과 존엄이 있다. 지도자는 이들의 어려움을 정책으로 해결해야 할 사람이지 이들의 존재를 부담스럽게 표현할 사람이 아니다. 재정 부담이 크다면 재정구조를 설명하면 된다. 인력 운영에 문제가 있다면 제도 개선을 제시하면 된다. 굳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비유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좋은 지도자의 말은 문제를 설명하면서도 사람의 존엄을 지킨다.

 

사과에도 품격이 필요하다

정치인의 실언이 발생했을 때 중요한 것은 사과의 진정성이다. 사과는 상대방이 오해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표현이 왜 잘못됐는지를 인정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발언의 맥락을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설명이 지나쳐 변명으로 들리거나 상대방의 상처를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과는 오히려 새로운 논란을 낳을 수 있다. 이번 소방 재정 발언을 둘러싼 사과 과정이 보여준 교훈도 여기에 있다.

진정한 사과에는 책임 인정과 재발 방지, 그리고 행동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말로 사과한 뒤에도 같은 태도를 반복한다면 국민은 더 이상 사과를 믿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잘못을 인정하고 당사자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실질적인 정책 개선으로 이어간다면 상처받은 신뢰를 회복할 가능성도 생긴다. 추 지사가 밝힌 소방 재정 확충과 소방관 처우 개선 의지가 실제 정책과 예산으로 이어지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사과의 완성은 기자회견장의 한마디가 아니라 이후의 실천에 달려 있다.

 

말조심은 몸조심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치지도자의 품격은 말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현장을 찾는 자세, 위기 상황에서 보이는 행동에도 나타난다. 재난 현장에서 피해자와 유가족의 마음을 헤아리는가. 공식 행사에서 국민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가. 자신보다 낮은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도 예의를 지키는가. 언론의 질문이 불편하더라도 책임 있게 답하는가. 이러한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모여 지도자의 인격과 신뢰를 형성한다.

말조심과 몸조심은 단순히 실수를 피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언행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먼저 생각하라는 의미다. 권력을 가진 사람의 무심한 한마디는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가 될 수 있고 성급한 행동 하나는 국민의 불신을 키울 수 있다. 반대로 따뜻한 위로 한마디와 진정성 있는 행동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지도자의 언행은 국민을 향한 권력의 태도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거울이다.

 

디지털 시대, 말 한마디는 영원한 기록이 된다

오늘날 정치지도자의 언행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확산된다. 국정감사장의 발언은 실시간 영상으로 전달되고 기자회견의 한 문장은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발언의 앞뒤 맥락이 생략된 짧은 영상이 확산되면서 본래의 취지와 다르게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지도자는 더욱 정확하고 신중하게 말해야 하며 언론과 시민 역시 전체 맥락을 확인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 번 공개된 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영상과 기사, 기록으로 남아 다시 평가받는다. 과거에는 공식 석상에서의 실언이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리고 지나갔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다르다. 짧은 문장 하나가 정치인의 오랜 경력을 흔들고 정당의 신뢰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 지도자에게 언어의 절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자질이 됐다. 말을 잘하는 정치인보다 자신의 말이 남길 결과를 먼저 생각하는 정치인이 필요한 시대다.

 

권력의 크기만큼 언행의 책임도 커져야 한다

정치지도자는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국회의원의 발언은 입법과 정치적 논쟁에 영향을 미치고 지방자치단체장의 발언은 지역 행정과 공직사회에 파장을 낳는다. 대통령의 말은 국가의 정책과 대외적 신뢰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지도자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와 함께 그 표현이 가져올 결과를 감당할 책임도 져야 한다.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것과 상대방을 모욕하는 것은 다르다. 정책을 비판하는 것과 사람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도 다르다. 강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 거친 말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상대방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다. 언어의 품격은 결코 나약함이 아니다. 절제된 말 속에 더 큰 설득력이 담길 수 있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에서 더 깊은 신뢰가 만들어질 수 있다.

 

국민은 거친 입보다 따뜻한 마음을 원한다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 여러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서민은 생활비를 걱정하고 자영업자는 매출을 걱정하며 청년은 일자리와 미래를 고민한다. 고령층은 건강과 노후를 걱정하고 사회적 약자는 자신들의 권리와 기회가 충분히 보장받을 수 있을지 불안해한다. 이런 현실에서 정치지도자들이 서로를 향해 거친 말을 쏟아내고 국민에게 상처를 주는 표현으로 논란을 일으키는 모습은 실망을 키울 뿐이다.

국민이 원하는 지도자는 화려한 언변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려운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잘못된 정책은 바로잡으며 자신이 실수했을 때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소방관에게는 존중과 지원을, 어려운 이웃에게는 위로와 실질적인 도움을,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에게는 희망을 전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정치의 언어가 국민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돼야 한다.

 

말 한마디가 지도자의 역사를 바꾼다

역사는 수많은 지도자의 말과 행동을 기억한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던 말도 남아 있고 오만과 편견을 드러냈던 말도 기록돼 있다.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는 주변의 박수와 지지에 가려 자신의 언행이 얼마나 무거운지 깨닫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권력의 크기보다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가 평가받는다. 국민을 존중한 지도자는 오래 기억되지만, 국민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 지도자는 그 말과 행동으로 비판받게 된다.

추미애 경기도지사의 소방 재정 발언 논란은 특정 정치인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정치지도자가 자신을 돌아봐야 할 계기다. 재정의 어려움을 설명할 때도 사람의 존엄을 지켜야 하고 정책을 비판할 때도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 실수를 했다면 책임 있게 인정하고 사과한 뒤에는 행동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며 정치의 품격을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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