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을 어기면 탈락한다 — 월드컵도, 민주주의도

김헌태논설고문

2026-07-12 17:37:56

 

 

 

월드컵은 냉정했다 — 1승 2패, 룰 앞에 한국도 예외는 없었다
2026 북중미 FIFA 월드컵이 7월 19일 결승을 향해 치닫고 있는 가운데, 대한민국은 조별리그에서 쓸쓸히 짐을 쌌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태극전사들은 A조에서 체코·멕시코·남아프리카공화국과 맞붙어 체코전 2대1 역전승으로 희망을 품었지만, 멕시코에 0대1로 패한 뒤 남아공에도 0대1로 무릎을 꿇으며 1승 2패, 승점 3점으로 조 3위에 그쳤다. 48개국이 참가하는 사상 최대 규모 대회에서 조 3위 12개 팀 중 상위 8팀에게 주어지는 와일드카드 기회마저 골 득실에서 밀리며 결국 전체 34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8년 만의 조별리그 탈락이다. 아쉬움이 크지만, 이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월드컵은 응원의 열기나 선수의 명성보다 경기장 안에서의 결과로 모든 것을 판가름한다. 반칙에는 VAR(비디오 보조 심판)이 작동하고, 규칙을 어기면 퇴장당하며,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스포츠 정신의 본질이다. 그 냉정한 룰 앞에서는 어떤 팀도 예외가 없다.
월드컵의 이 명쾌한 원칙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각별하다. 실력이 부족하면 탈락한다. 전술이 실패하면 패한다. 감독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성적표에 새겨진다. 그리고 그 성적표 앞에 어느 누구도 특권을 주장하거나 책임을 회피하지 못한다. 이것이 스포츠가 갖는 위대한 공정성이다. 이 공정한 룰이 수십억 인류를 하나로 묶는 힘이다. 관중들이 결과에 승복하고 박수를 보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지금 대한민국의 선거 관리 시스템은 어떤가.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가 한 표를 행사하지 못하고, 그 사태를 일으킨 책임자들이 국정조사장을 오전에 집단으로 외면하다가 여야의 질타가 쏟아지고 나서야 오후에 마지못해 나타나는 나라에서, 공정한 선거의 룰은 과연 살아 있는가.

 

선관위의 교만 — 국정조사장에서 드러난 무책임과 오만의 극치
6월 23일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1차 기관 보고에서 선관위의 행태는 월드컵 정신과 정반대였다. 증인으로 채택된 관계자 40여 명 중 16명이 오전에 출석하지 않았다. 중앙선관위 비상임위원 7명 전원이 국정조사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여야 의원들의 거센 질타가 쏟아지자, 오후 들어 마지못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노태악 전 위원장이 투표용지 인쇄 축소 지침에 대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발뺌으로 일관했다. 선관위는 사태 최초 인지 시점과 투표용지를 추가 공급받은 투표소 수 등 기초 사실관계조차 말을 계속 바꾸며 엉망진창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월드컵에서 오프사이드 수십 센티미터 차이도 VAR로 정확하게 판독하는 시대에, 국민의 한 표를 관리해야 할 헌법기관이 자신들의 실수조차 기억하지 못한다고 버티는 것이다.
선관위의 비효율과 교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이 드러나고 있다. 2022년 대선의 소쿠리 투표 사건, 2025년 고위직 자녀 특혜 채용 의혹과 부실 근태,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직원들의 단기 휴직 문제, 노태악 전 위원장의 재임 중 세 차례 해외 출장 전부 배우자 동반, 두 차례 유럽 출장에만 1억 6,247만 원 혈세 집행 —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구조를 향한다. 선관위 비상임위원들은 인사청문회를 통해 책임을 부여받았지만, 실질적 권한은 인사청문회도 거치지 않은 사무총장이 행사해 왔다는 것이다. 책임과 권한이 분리된 이 비정상적 구조가 수십 년간 방치되면서 무능과 부패가 만성화됐다. 월드컵 팀이 전술도, 훈련도 없이 경기장에 나선 것이나 다름없는 조직이 국민의 신성한 한 표를 관리해 온 것이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명쾌하다 —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시스템 개혁
올림픽공원의 함성은 아직 멈추지 않고 있다. 교수들의 시국선언, 학부모 단체의 외침, 대학생들의 집회, 중학생의 구호,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까지 — 대한민국 사회 전 계층이 참정권 수호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는 전례 없는 광경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복잡하지 않다. 왜 투표용지가 부족했는지,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어떻게 고칠 것인지 — 이 세 가지다. 국민의힘은 선관위 해체 수준의 개혁과 야당 추천 특검 도입을 요구하고 있고, 국정조사 특위 위원회는 국민의힘 7명, 민주당 9명, 비교섭단체 2명이 8월 1일까지 45일간 국정조사를 진행 중이다. 7월 14일과 22일 청문회가 예정돼 있다. 이 자리에서 진실이 밝혀지느냐 아니냐에 따라 선관위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여야의 셈법이 다소 갈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이 원하는 방향은 하나다. 선거 결과를 둘러싼 정쟁이 아니라 선거 관리 시스템의 근본적 수술이다.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이 지적했듯, 선관위가 무능·부패 조직이 된 것은 헌법을 오독해온 관행과 책임 없는 구조에서 비롯됐다. 민주당이 출범시킨 선거제도 개혁 TF가 투표용지 인쇄·배분·보관 체계 개선과 개표 절차 투명성 강화를 논의하는 것은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하지만 제도 개선만으로는 부족하다. 책임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없다면, 같은 일은 반드시 반복된다. 월드컵에서 반칙을 저지른 선수가 경고 없이 계속 뛴다면 그 경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선관위의 반칙에도 반드시 상응하는 제재가 따라야 한다.

 

바른길은 하나다 — 공정한 룰과 책임 위에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다시 세워라
월드컵의 교훈으로 돌아가자. 한국 축구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것은 뼈아프다. 그러나 그 결과에 승복하고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냉정하게 분석해 다음 대회를 준비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대한민국 선거 관리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치명적 실패다. 그 실패를 은폐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낱낱이 밝히고 다시는 같은 실패가 반복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수술하는 것이 유일한 정답이다. 그 과정에서 고의적 과실이나 직무 유기가 밝혀진다면 그에 상응하는 법적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 책임 없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것을 선관위는 스스로 증명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다시 서기 위한 조건은 단순하다. 선거는 공정해야 하고, 그 공정성을 지키지 못한 자는 책임을 져야 하며, 더 나은 시스템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월드컵에서 부당한 판정이 나왔을 때 VAR이 진실을 밝혀내듯, 선관위 사태의 진실도 국정조사 청문회와 수사를 통해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 올림픽공원 앞에서 한 표의 소중함을 외치는 국민의 목소리가 정치의 계산보다 앞서야 한다. 대한민국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수십 년 동안 참정권을 지켜온 나라다. 투표용지 한 장이 흔들리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국정조사 청문회가 열리는 7월, 대한민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하다. 공정한 룰을 되찾고, 그 룰을 어긴 자를 심판하며, 더 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월드컵에서 탈락한 태극전사들이 다음을 위해 교훈을 삼듯, 이 나라가 이 사태에서 얻어야 할 역사적 교훈이다. 월드컵도, 선거도, 공정한 룰과 그 룰에 대한 책임이 모든 것의 출발이다. 룰을 어긴 자에게 관대한 나라에서 진정한 승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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