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선 9기 100일, 단체장이 바뀌었다고 주민의 권리까지 지울 것인가

김헌태논설고문

2026-10-09 18:41:27

 

 

 

민선 9기 지방자치가 출범한 지 100일을 맞았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통해 그동안의 성과를 설명하고 앞으로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며 지역발전의 청사진을 펼쳐 보인다. 그러나 주민들이 진정으로 듣고 싶은 것은 화려한 구호나 장밋빛 약속만이 아니다. 지난 100일 동안 무엇이 달라졌으며 누구의 삶이 나아졌고 어떤 주민의 어려움이 해결됐는가 하는 것이다. 단체장의 취임 100일은 스스로 업적을 자랑하는 시간이 아니라 주민 앞에 행정의 성적표를 내놓는 시간이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장이 바뀌면 정책의 우선순위가 달라질 수 있다. 선거를 통해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한 주민의 뜻이 행정에 반영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정권은 바뀔 수 있어도 행정의 공공성과 주민의 권리는 함부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전임 단체장이 추진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업을 중단하거나 성과를 지우려 한다면 그것은 혁신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가 앞선 행정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지방자치는 어느 정치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주민 모두의 삶을 책임지는 공적 제도이기 때문이다.

 

취임 100일, 누구를 위한 변화였는가

민선 9기 단체장들에게 묻고 싶다. 지난 100일 동안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어디였는가. 선거를 도왔던 사람들의 사무실이었는가, 아니면 생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전통시장과 장애인의 일터, 홀로 살아가는 노인의 집이었는가. 새로운 인사와 조직개편에 쏟은 관심만큼 주민의 민원과 복지 사각지대에도 귀를 기울였는가. 정책의 이름을 바꾸는 일보다 주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앞세웠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취임 100일의 진정한 평가가 될 것이다.

지방자치의 본질은 주민자치와 생활자치에 있다. 주민의 생활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행정이 작동하고 지역의 문제를 주민과 함께 해결하는 것이 지방자치의 존재 이유다. 중앙정부가 미처 살피지 못하는 골목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지역의 특성과 요구를 정책에 반영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방자치가 주민을 위한 행정이 아니라 단체장의 권한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변질된다면 그 존재 이유부터 흔들리게 된다. 지방자치의 주인은 단체장이 아니라 주민이다. 이 원칙을 잊는 순간 자치는 권력의 사유화로 기울기 시작한다.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개혁인가

정권교체 이후 가장 경계해야 할 현상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전임자 지우기다. 전임 단체장이 추진했던 사업을 다시 검토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예산 낭비가 있었거나 실효성이 부족한 사업이라면 당연히 개선해야 한다. 주민의 요구가 달라졌다면 정책도 변화해야 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평가 없이 전임자의 정치적 소속이나 업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업을 폐지하거나 축소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행정의 합리성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앞선 결정으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정책에는 주인이 따로 없다. 전임 단체장이 시작한 사업이라도 주민에게 필요하고 공익성이 확인된다면 이어가야 한다. 반대로 같은 정당 소속 단체장이 추진한 사업이라도 잘못됐다면 과감하게 바로잡아야 한다. 행정의 기준은 정당의 색깔이 아니라 주민의 이익이어야 한다.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는 데 행정력을 소모하는 동안 정작 주민에게 필요한 정책은 표류할 수 있다. 단체장의 임기는 4년이지만 주민의 삶은 선거 때마다 새로 시작되지 않는다. 행정의 연속성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전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선 까닭

이러한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 일이 대전에서 벌어졌다. 대전광역시척수장애인협회는 지난 10월 8일 대전시청에서 대전형 장애인표준사업장의 정상 추진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협회 측은 중증장애인의 안정적인 일자리와 경제적 자립을 위해 추진된 사업에 관련 조례를 근거로 20억 원의 예산이 편성되고 교부 결정까지 이뤄졌으나 실제 사업 추진이 지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장애인 당사자와 회원들은 사업의 정상화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이 내세운 구호는 분명했다. “정권은 바뀌어도 장애인의 일자리는 멈출 수 없다.”

이 문제는 단순히 예산 20억 원을 집행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중증장애인에게 일자리는 생계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기회다. 일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경제적 자립의 가능성이 걸려 있다. 다만 사업 지연의 원인이 정치적 의도 때문인지, 재정·법률·행정 절차상의 문제 때문인지는 구체적인 확인이 필요하다. 예산이 편성되고 교부 결정이 이뤄졌다는 주장만으로 모든 집행 요건이 충족됐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 대전시의 투명하고 책임 있는 설명이다. 어떤 문제가 있는지,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지, 정상 추진이 가능하다면 언제까지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를 장애인 당사자와 시민 앞에 밝혀야 한다.

 

장애인의 일자리는 정치적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장애인 일자리 정책은 일반적인 행정사업과는 또 다른 무게를 갖는다. 장애인에게 노동은 단순한 소득 활동을 넘어 사회참여와 자립,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특히 중증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해 취업 기회와 근로환경에서 더 많은 제약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정부는 장애인의 일할 권리를 보장하고 안정적인 고용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장애인표준사업장과 같은 정책을 평가할 때도 이러한 공익적 가치를 우선하여 고려해야 한다.

사업을 추진하는 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설명해야 한다. 법률상 문제가 있다면 보완하고 재정상 부담이 있다면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 당초 계획에 문제가 있다면 장애인 당사자와 협의해 개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충분한 설명과 협의 없이 사업이 장기간 지연된다면 당사자들의 불신과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 행정기관의 결정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기다리던 취업의 기회를 잃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산서에는 숫자로 적혀 있지만 그 숫자 뒤에는 일하고 싶은 사람들의 절실한 삶이 있다.

 

일몰 행정에도 원칙과 책임이 있어야 한다

행정에서 일몰제는 법령이나 조례 등에 따라 일정한 기간이나 조건을 정해 제도 또는 사업의 존속 여부를 판단하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정책의 효과가 떨어졌거나 사회적 여건이 바뀌었다면 불필요한 사업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정된 재정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정책 조정도 지방자치단체장의 중요한 책임이다. 따라서 사업의 폐지나 조정 자체를 무조건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모든 사업 중단이 법적 의미의 일몰제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해당 사업에 적용되는 법령과 조례, 예산 및 집행 절차를 정확하게 구분하고 판단하는 일이다.

조례에 근거한 사업이라고 해서 영원히 변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예산이 편성됐다고 모든 사업비를 조건 없이 집행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적법한 절차를 거쳐 추진된 사업을 단체장의 의중만으로 아무 설명 없이 중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업을 폐지하거나 축소하려면 법적 근거와 예산 절차를 검토하고 정책 효과와 주민 피해를 분석하며 필요한 경우 의회 심의와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을 거쳐야 한다. 특히 취약계층의 생활과 직결된 사업이라면 대체 수단과 피해 최소화 방안까지 마련해야 한다. 일몰제는 정책의 타당성을 판단하기 위한 제도이지 정치적으로 불편한 정책을 지우는 지우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자치단체의 100일이 보여주는 과제

최근 대전 서구의 사례는 정책 연속성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전문학 서구청장은 지난 10월 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민선 8기 사업의 연속성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임 시기의 사업과 정신을 존중하며 주민에게 약속한 정책을 일관되게 이행해야 신뢰가 생긴다는 취지였다. 동시에 재정 여건상 모든 사업을 당초 계획대로 추진하기 어려운 현실도 설명했다. 반다비 체육관과 복합커뮤니티센터 등 대규모 재정 수요를 고려해 사업의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행정의 연속성과 재정 책임을 함께 고민해야 하는 지방정부의 현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대전의 일부 자치구에서는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 전임 단체장이 추진했던 사업과 민선 9기 공약을 함께 재검토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대전 동구는 기존 교육 관련 사업의 운영 방식을 검토했고, 서구는 일부 주민편의시설 사업계획의 조정 가능성을 밝혔으며, 대덕구 역시 재정 여건을 고려한 사업 우선순위 검토에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조정을 모두 정치적 보복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전임 사업이라고 무조건 유지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며 새 단체장의 공약이라고 무조건 우선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주민에게 필요한가,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가, 법적 절차는 적절한가, 다른 사업보다 우선해야 할 이유가 충분한가를 공개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주민의 삶은 정치적 승패를 넘어선다

최근 발표된 중소벤처기업부의 2026년 9월 소상공인 시장 경기동향조사에 따르면 전국 소상공인의 체감 경기지수는 63.6으로 전월보다 4.4포인트 하락했다. 지역의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느끼는 어려움이 여전히 가볍지 않다는 의미다. 지방정부가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곳은 이런 민생 현장이다. 골목상권의 빈 점포와 전통시장의 한숨, 청년의 취업 걱정과 농민의 생산비 부담, 장애인의 일자리와 노인의 돌봄 문제가 단체장의 정치적 이해관계보다 앞서야 한다.

주민은 선거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당선자는 자신을 지지한 사람만의 단체장이 아니라 모든 주민의 단체장이 된다. 반대 후보를 지지했던 주민도 같은 세금을 내고 같은 행정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정책을 정당의 색깔로 구분하고 주민을 지지 여부에 따라 나누기 시작한다면 지방자치는 분열의 장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선거의 승리는 권한을 독점하라는 허가장이 아니라 더 무거운 책임을 지라는 주민의 명령이다.

 

지방의회도 침묵해서는 안 된다

지방자치단체장의 권한이 커질수록 지방의회의 견제와 감시 기능은 더욱 중요해진다. 의회는 단체장의 정책을 무조건 반대하는 기관도 아니고 무조건 추인하는 기관도 아니다. 주민을 대신해 예산과 조례, 행정의 적정성을 살피는 대의기관이다. 조례에 근거한 사업이 지연되거나 예산의 집행 방향이 달라진다면 그 이유를 확인하고 필요한 자료를 요구해야 한다. 주민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 변경이라면 공개적인 논의의 장도 마련해야 한다.

특히 장애인과 노인, 저소득층처럼 정책 변화에 취약한 주민들의 권익이 걸린 문제에서는 여야를 떠난 책임 있는 대응이 필요하다. 지방의회가 단체장과 같은 정당이라는 이유로 침묵하거나 반대 정당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정책을 거부한다면 주민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행정부와 의회가 서로 견제하면서도 주민의 복리를 위해 협력할 때 지방자치는 건강하게 작동한다. 의회가 지켜야 할 것은 정당의 체면이 아니라 주민의 권리다.

 

민선 9기, 지금부터라도 행정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

취임 100일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남은 임기 동안 얼마든지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고 새로운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첫 100일의 성과를 얼마나 화려하게 포장하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어떤 원칙으로 행정을 이끌어갈 것인가다. 새 단체장들은 전임 정책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체계를 마련하고 주요 사업의 유지·변경·폐지 사유를 주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예산이 편성된 사업의 집행 지연 원인과 향후 계획도 설명해야 한다. 취약계층의 권익과 직결된 정책은 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결정해야 한다.

인사 역시 마찬가지다. 공공기관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존중하고 능력 중심의 인사 원칙을 세워야 한다. 정책의 연속성을 지키면서도 필요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균형감각이 요구된다. 주민참여와 정보공개를 확대하고 지방의회의 정당한 감시를 존중해야 한다. 행정의 신뢰는 기자회견장의 선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약속을 지키고 잘못을 인정하며 주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상의 실천 속에서 쌓인다.

 

권력은 지나가지만 주민의 삶은 계속된다

지방자치단체장의 자리는 영원하지 않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도 임기는 정해져 있고 언젠가는 다음 사람에게 그 자리를 넘겨줘야 한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주민의 삶은 계속된다. 오늘 태어난 아이가 자라고 청년이 일자리를 찾으며 중년의 가장이 가정을 지키고 노인이 여생을 살아가는 공간이 바로 지방자치의 현장이다. 단체장의 이름은 바뀌어도 주민의 삶은 끊어지지 않는다. 행정은 바로 그 연속된 삶을 지켜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대전의 장애인들이 거리에서 외친 목소리를 다시 생각한다. “정권은 바뀌어도 장애인의 일자리는 멈출 수 없다.” 이 외침은 단지 하나의 사업을 정상화해 달라는 요구에 그치지 않는다. 권력이 바뀌더라도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기회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일깨우는 말이다. 그 요구가 타당한지, 사업 추진에 어떤 장애가 있는지는 행정이 사실과 법률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절박한 목소리에 답하는 것만큼은 미뤄서는 안 된다.

지방자치는 권력을 차지한 사람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가 아니다. 주민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다.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는 데 몰두하는 단체장보다 전임자의 성과는 이어받고 잘못은 바로잡는 단체장이 진정한 지도자다. 자신의 측근을 얼마나 많이 배치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유능하고 공정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세웠는지로 평가받아야 한다. 새로운 건물을 몇 개 세웠는지가 아니라 주민의 눈물을 얼마나 닦아주었는지로 기억돼야 한다.

 

민선 9기 출범 100일.
이제 단체장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홍보가 아니라 더 깊은 성찰이다.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주민 모두의 승리로 바꾸는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전임자의 성과를 인정할 줄 아는 포용력,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는 결단력,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듣는 따뜻함이 필요하다.

권력은 4년마다 바뀔 수 있다. 그러나 행정의 양심까지 4년마다 바뀌어서는 안 된다.
정치는 경쟁할 수 있지만 행정은 주민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정책은 바뀔 수 있지만 주민의 권리는 정치적 판단에 따라 가볍게 취급돼서는 안 된다.
100일의 성적표는 기자회견장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시장의 골목에서, 장애인의 일터에서, 노인의 작은 방에서, 청년의 삶에서 비로소 쓰인다.
단체장의 이름을 남기는 지방자치가 아니라 주민의 삶을 남기는 지방자치.
그것이 민선 9기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며, 진정한 지방자치의 시대를 열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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