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을 배워도 말 못 하는 나라 '영어교육이 드러낸 세계화 전략의 구멍'

EF 영어능력지수 48위, 지난 해 수능 영어 1등급 3.11% 파동... 시험에 갇힌 영어, 이제 활용능력의 격차가 국가 경쟁력을 가른다

김헌태논설고문

2026-11-01 09:34:16

 

 

 

48위, 숫자가 보내는 경고
국제 영어교육기관 EF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2025 영어능력지수(EPI)’에서 한국은 123개국 가운데 48위를 기록했다. 점수는 522점으로 전년보다 1점 내렸고, 순위도 한 계단 떨어졌다. 보도에 따르면 하락세는 2년째 이어지고 있다. 세계 평균 488점은 웃돌지만, 1위 네덜란드(624점)와의 격차는 100점이 넘고 아시아에서도 말레이시아(581점, 24위)에 한참 뒤처진다. 영어를 공용어처럼 쓰는 환경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 해도, 한국이 이웃 나라들과 경쟁하는 무대는 이미 영어로 열려 있다. 무역과 투자, 학술 발표와 국제 표준 논의 어디에서나 영어가 기본 언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EF 지수는 온라인 시험에 자발적으로 응시한 사람들의 결과이므로 국민 전체의 실력을 대표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숫자의 정확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까지 10년을 정규 교과로 배우고, 가계는 막대한 사교육비를 쏟아붓는데도 ‘쓸 수 있는 영어’의 지표가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투입과 성과가 어긋난 구조를 의심해야 한다. 순위 몇 계단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방식으로 계속 가르치고 계속 시험을 보는 체제가 과연 변화한 세계에 맞는지 묻는 일이다. 인공지능이 번역과 통역을 대신하는 시대에도 영어 능력의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정보와 기회를 직접 읽고 판단하고 교섭하는 힘이 결국 언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영어는 시험이 되었고, 말은 사라졌다
지난해 11월 13일 치러진 2026학년도 수능 영어는 이 구조적 문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었다. 영어 영역 1등급 비율은 3.11%, 인원으로는 1만 5,154명에 그쳤다. 전년도의 6.22%에서 절반으로 뚝 떨어졌고, 절대평가가 도입된 2018학년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절대평가의 취지는 점수 경쟁의 부담을 덜고 학생들이 영어의 본질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시험이 이 취지에서 벗어나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지난해 12월 10일 “무거운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임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수능 영어가 듣기와 읽기로만 구성된다는 점이다. 말하기와 쓰기는 평가 틀 밖에 놓여 있다. 학교와 학원은 평가되는 것을 가르치고, 학생은 평가되는 것을 공부한다. 이것은 학생과 교사의 잘못이 아니라 제도가 보내는 신호에 대한 합리적인 반응이다. 해마다 난이도가 널뛰고 말하기·쓰기가 빠진 시험 앞에서 영어는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독해와 문제 풀이의 기술’로 굳어진다. 학생들은 지문 속 어휘와 문장 구조에는 능숙해지지만, 낯선 사람 앞에서 자기 생각을 영어로 설명하는 경험은 거의 쌓지 못한다. 시험을 통과하는 영어와 현실에서 통하는 영어 사이의 간극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평가원장의 사임은 한 사람의 책임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출제 방향이 흔들릴 때 수험생은 불안해지고, 불안한 수험생은 더 많은 사교육에 기댄다. 입시의 신뢰가 무너지면 공교육의 영어 수업도 함께 흔들린다는 사실을 교육 당국은 직시해야 한다.

 

영어 격차는 가계 소득으로 이어진다
공교육이 채우지 못한 자리는 사교육이 메웠다. 국가데이터처와 교육부가 올해 3월 발표한 ‘2025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를 보면 사교육비 총액은 27조 5천억 원으로 전년보다 5.7% 줄었고 참여율도 75.7%로 4.3%포인트 낮아졌다. 다행스러운 변화다. 그러나 참여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60만 4천 원으로 2.0% 올랐다. 참여하는 가정의 부담은 오히려 커졌다는 뜻이다.
영어 사교육은 출발선부터 다르다. 교육부가 통계청에 의뢰해 2024년 7~9월 실시한 ‘유아 사교육비 시험조사’에서 영어학원 유치부, 이른바 영어유치원의 월평균 비용은 약 154만 5천 원이었다. 유치원 나이의 아이 한 명에게 월 150만 원이 넘는 돈을 쓸 수 있는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의 격차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벌어진다. 영어가 개인의 선택 과목이 아니라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된 나라에서, 공교육의 영어 책임을 말하지 않는 세계화 전략은 구호에 불과하다. 사교육 총액이 줄었다는 통계에 안도할 것이 아니라, 줄어든 자리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채우는지, 참여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디에서 영어를 만나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농어촌과 소규모 학교의 아이들에게 영어는 여전히 접근하기 어려운 자원일 수 있다. 감소세 속에서도 참여 가정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점은 양극화의 신호일 수 있다.

 

교육부의 처방은 늘 한 박자 늦었다
교육부의 대응은 일관성과 속도 모두에서 의문을 남긴다. 2024년 11월 교육부는 AI 교과서 이행안을 발표하면서 영어와 수학은 원래 계획대로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영어는 앞선 단계에서 뒤처진 학생이 점점 더 격차를 키우는 이른바 ‘위계 과목’이어서 맞춤형 학습이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문제의식 자체는 타당했다. 그러나 현장 연수와 검증이 충분히 이뤄졌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교사가 새 도구를 이해하고 수업에 녹여 낼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정책부터 밀어붙이면, 좋은 취지도 불신으로 돌아온다.

결과는 정책의 혼선이었다. 2025년 1학기 희망 학교를 중심으로 도입된 AI 교과서는 채택률이 약 3분의 1에 머문 가운데, 실제 사용을 시작한 지 석 달도 안 된 2025년 8월 4일 국회 본회의에서 교과서가 아닌 ‘교육자료’로 규정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발행사들은 법안 처리 전부터 “검증 없이 정책을 폐기하려 한다”고 반발했고, 현장에서는 후폭풍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영어교육의 근본 과제인 말하기·쓰기 평가, 초등 교사의 영어 수업 역량, 학교 간 격차를 풀 장기 로드맵이 먼저 있어야 했는데, 도구의 도입과 폐기만 요란했던 셈이다. 교육 정책의 신뢰는 속도가 아니라 예측 가능성에서 나온다. 현장 교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일정과 기준이 없으면 어떤 첨단 도구도 교실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정책이 정권과 정치 일정에 따라 뒤집히는 사이 아이들의 영어는 제자리에 머문다.

 

상위권 국가들은 무엇이 달랐나
2025년판 지수의 상위 다섯 나라는 네덜란드, 크로아티아, 오스트리아, 독일, 노르웨이다. 모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이며, 인구와 경제 규모도 제각각이다. 영어 실력이 국력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들 나라가 어떻게 앞서가는지를 우리는 진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들 나라의 비결로는 흔히 일상에서 영어를 접하는 환경, 자막 중심의 영상 문화, 어릴 때부터 말하고 쓰는 수업 방식이 거론된다. 정확한 인과관계는 더 따져 봐야 하지만, 공통점은 영어를 ‘시험 과목’이 아니라 ‘쓰는 언어’로 대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한국은 영어를 쓸 기회가 구조적으로 부족하다. 교실에서는 교사의 설명을 듣고 문제를 푸는 시간이 길고, 학생이 직접 말하고 글을 써 보는 시간은 짧다. 말하기는 틀리면 점수가 깎이는 위험한 행위가 되고, 침묵이 가장 안전한 전략이 된다. 이런 환경에서 10년을 보낸 학생에게 갑자기 영어로 말해 보라고 하는 것은, 수영 이론만 가르쳐 놓고 바다에 던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학교가 바꾸지 않으면 학원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학원은 다시 시험이 요구하는 것만 가르친다. 이 악순환을 끊을 책임은 가정이 아니라 제도를 설계하는 교육부에 있다.

 

세계화는 구호가 아니라 역량이다
세계화 전략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다. 반도체와 자동차를 수출하는 나라이면서, 계약서와 기술 문서와 국제회의 현장에서 영어로 협상할 인재를 충분히 키우지 못한다면 그 전략에는 구멍이 있다. 영어 활용 능력의 지체는 개인의 불편을 넘어 수출, 외교, 학술 교류, 인공지능 시대의 정보 접근성까지 좌우하는 국가적 비용이 된다. 청년이 해외 시장에서 일자리를 찾고, 중소기업이 해외 바이어와 직접 협상하고, 지방 대학의 연구자가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모든 장면에서 영어는 출발선이 된다. 영어 지체는 곧 기회의 지체다. 인공지능 번역이 일상이 된 오늘날에도, 번역기에 의존하는 사람과 스스로 의미를 파악하고 말하는 사람 사이의 격차는 오히려 커질 수 있다. 도구가 발달할수록 그 도구를 비판적으로 활용하는 기본 언어 능력의 가치는 높아진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첫째, 평가의 안정성과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 수능 영어의 난이도 관리 실패에 대한 철저한 원인 규명과 함께 말하기·쓰기를 공교육에서 체계적으로 평가하는 방안을 단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둘째, 초등 영어를 담당할 교사의 의사소통 중심 수업 역량에 투자해야 한다. 교사가 자신 있게 영어로 수업하고 학생의 말을 끌어낼 수 있도록 연수와 수업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셋째, 방과후 영어와 지역 거점 프로그램으로 소득과 지역에 따른 출발선 격차를 줄여야 한다. 공교육이 가장 먼저 책임져야 할 대상은 사교육에 접근하기 어려운 아이들이다. 넷째, 인공지능 기반 말하기 연습 도구는 효과를 충분히 검증한 뒤 점진적으로 확산해야 한다.

정책은 바뀌어도 아이들의 학습은 끊기지 않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부가 정권의 교체나 여론의 흐름과 무관하게 지켜낼 영어교육 중장기 계획을 국민 앞에 내놓고, 해마다 그 성과를 숫자로 공개하는 책임 있는 행정이 필요하다. 영어는 시험을 위한 과목이 아니라 세계와 대화하는 능력이다. 10년을 배우고도 말문이 막히는 교육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계화를 말하면서 세계 앞에서 침묵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경각심은 순위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미래 앞에서 가져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구호가 아니라, 평가와 수업과 교사와 격차를 함께 바라보는 일관된 설계와 그것을 끝까지 지켜내는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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