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고 관사는 12억 — 취임 75일 만에 사퇴 청원 3만 명의 경고
취임 75일. 그 짧은 시간 안에 사퇴 청원 3만 명. 이것이 추미애 경기도지사가 도민 앞에 받아든 성적표다. 9월 11일 경기도청원 홈페이지에 올라온 '추미애 도지사 사퇴를 청원합니다'라는 청원은 불과 사흘 만에 공식 답변 요건인 1만 명을 넘어섰고, 9월 15일 현재 3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추 지사는 취임 직후 재정 비상을 선언하고 5,465억 원 규모의 세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산후조리비 지원 사업을 종료했고, 시·군 도비 보조율에 최대 30% 상한을 일방 통보했으며, 공무원 인센티브를 절반 이하로 삭감했다. 도민 반발이 거세지자 경기도는 '민생 필수 예산이 9개월분만 반영됐기 때문에 불가피한 조치'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바로 그 재정 비상 선언과 동시에 드러난 것이 있다. 추 지사가 보증금 12억 원이 넘는156㎡( 47평형) 아파트를 혼자 사용하는 관사로 계약했다는 사실이다.여기에다 추지사는 지난 6월29일 아이오닉9를 7,765만원에 수의계약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퇴청원이 무려 3만명을 돌파한 것이다. 사퇴청원 3만명을 돌파하자 경기도는 나흘만에 '답변완료'전환으로 청원을 조기 종료 했다. 공식답변 내용은 하루 전 대변인 서면 브리핑과 동일했다.
도민들은 분노했다. 경실련경기도협의회가 '호화 관사 임대 계약을 철회하고 해당 예산을 환수하라'고 요구했지만 경기도는 관사 문제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았다. 산후조리비 지원 종료에 반발하는 청원에도 2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 민주당 재정 건전성 TF의 자체 분석에서도 '경기도의 재정 채무 비율은 약 12%로 법이 정한 위기 상황인 25%보다 낮다'고 나왔다. 재정 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는 가운데, 긴축의 고통은 산모와 공무원과 도민에게 전가되고 있다. 이것이 지역을 위해 일하겠다고 선출된 지도자의 모습인가. 개혁의 이름으로 시작된 긴축이 도민의 일상을 위협하는 부작용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 괴리 앞에서 도민들은 지금 이 나라 지방자치의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라지고 행정이 단절된다 —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개혁인가
대전에서는 또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민선 8기 이장우 전 시장이 역점적으로 추진했던 대전 0시 축제가 민선 9기 허태정 시장 당선인의 첫 폐지 사업이 됐다. 2023년부터 3차례 개최된 이 축제는 대전역부터 옛 충남도청까지 이어지는 중앙로 일대를 차 없는 거리로 만들고 여름 밤 축제를 즐기는 대전의 새 명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 시장은 이를 '전시 행정의 대표적 사례'이자 '방만 경영의 표본'으로 규정하고 폐지를 선언했다. 대신 빵 축제를 전국 규모로 키우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축제의 내용이 좋고 나쁨을 떠나 시민들은 혼란스럽다. 어제까지 대전의 대표 축제라고 홍보했던 행사가 시장이 바뀌자마자 '방만 경영'으로 낙인찍힌다. 시민들은 어느 판단을 믿어야 하는가.
이것은 대전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단체장이 교체될 때마다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전임자의 역점 사업은 후임자의 첫 번째 폐지 목록에 오른다. 상주는 세계모자페스티벌을 접고 새 축제를 공모하기로 했고, 울산도 공업축제를 접고 처용문화제로 바꾸기로 했다. 4대강 보 해체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수십 조 원을 들여 건설한 보를 해체하고, 다시 수자원 확보 차원에서 재검토하는 논쟁이 정권 교체마다 반복된다. 영농 전국 전수조사 방침도 뜬금없이 발표돼 농민들의 불안을 자극했다. 행정의 연속성은 국가 신뢰의 근간이다.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행정 단절은 시민과 도민이 감당해야 할 불필요한 비용과 혼란을 낳는다. 개혁이라는 이름이 붙어도, 그 행정 단절의 피해자는 언제나 시민이다.
폭락·부동산 불안·영농 전수조사 — 국민의 불안을 키우는 정책들
지방 행정의 모순은 중앙 정책의 혼돈과 맞닿아 있다. 레버리지 ETF로 인한 56조 원의 개인 투자자 손실 사태에서 금융당국이 '투자자 보호'를 내세우며 뒤늦게 규제에 나선 것도, 부동산 안정화 대책에 청년 주거 해법으로 4억 원 이하 빌라 대출 지원을 내놓은 것도 마찬가지다. 정책 당국이 문제를 인지하고 대응하는 속도와 국민이 피해를 입는 속도 사이의 간극이 이 나라의 고질적 문제다. 선불리 발표됐다가 반발에 부딪혀 수정되고, 다시 번복되는 정책의 롤러코스터가 국민의 불신을 키우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사전에 충분한 공론화와 검토 없이 발표부터 하고 보는 행정 관행이 정부 신뢰를 갉아먹는 것이다.
영농 전국 전수조사 방침은 이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법 농지 전용을 막겠다는 취지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발표와 불충분한 설명은 농업 현장에 불필요한 공포와 혼란을 일으켰다. '왜 지금, 왜 이런 방식으로'라는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이 먼저 국민에게 제시됐어야 했다. 정책은 내용만큼이나 방식이 중요하다.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정책은 사전 공론화, 충분한 설명, 단계적 시행이라는 민주적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이 원칙이 무너질 때, 아무리 선의의 정책도 국민의 저항과 불신을 마주하게 된다.
이후의 책임 — 국민을 위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
지금 대한민국 국민의 불안과 불신은 단발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다. 구조적 누적이다. 선거 때 '국민을 위해'를 외치는 정치인들이 권력을 얻고 나면 국민보다 자신의 철학과 노선, 그리고 다음 권력을 위한 계산이 앞서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재정 위기를 선언하고 복지를 삭감하면서 12억 관사에 입주하는 것은 '나는 예외'라는 특권의식의 발현이다. 전임자의 역점 사업을 방만 경영으로 규정하고 폐지하는 것은 '내가 시작한 것만 가치 있다'는 아집의 표현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질 때 행정은 국민을 위한 서비스가 아니라, 지도자의 자아실현 무대로 전락한다.
국민을 위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불편하더라도 공정하게, 인기가 없더라도 필요하다면, 반대가 있더라도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12억 관사를 계약하기 전에 '이것이 도민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전임자의 사업을 폐지하기 전에 '시민들이 이것에서 얻는 가치는 무엇인가'를 먼저 묻는 것이다. 정책을 발표하기 전에 '이 정책의 수혜자와 피해자는 누구인가'를 먼저 검토하는 것이다. 이 단순한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을 때, 개혁은 구호가 되고 행정은 고통이 된다. 지금 경기도 도민 3만 명의 청원이, 대전 시민들의 혼란이, 전국 농민들의 불안이 보내는 메시지는 하나다. 우리가 선출한 당신들, 제발 우리를 먼저 생각하라. 개혁의 이름이 붙은 정책이라도 국민이 더 고통스러워진다면 그것은 개혁이 아니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빌린 것이지,국민 위에 군림하는 특권이 아니다.










